"내 손 거친 연극만 70여편 좋은 희곡 있으면 먼저 제안 내 번역이 누군가의 삶에 약간의 충격 준다면 만족"
배우나 창작자는 아니지만 김광보, 박근형, 이성열, 최용훈 등 국내 대표적인 연극 연출가들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 평론가도 아닌데 특정 공연을 보고 또 보는 사람. 연극ㆍ뮤지컬을 번역하는 성수정(47)씨는 단순히 번역가라는 타이틀로는 설명이 안 된다. 2000년대 초반부터 그의 번역을 거쳐 무대에 오른 연극과 뮤지컬이 70여 편. 올해 번역한 신작만 6편이다. 그 중 ‘엔론’(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과 ‘별무리’(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두 편이 동시에 공연 중이고, 6월 12일부터 ‘스카이라잇’(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이 무대에 오른다. 좋은 희곡이 있으면 번역 의뢰가 없어도 오히려 먼저 극단에 제작을 제안하는 경우가 많아 그의 말마따나 “다른 번역가와는 견해가 다른 연극인”이다.
“정치풍자극이 발달한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연극을 보면서 사적인 예술 장르로 여겼던 연극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어요. 심지어 정치극이 인기도 높은데,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현실 비판이 연극의 본령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현지 연극인들의 설명이었죠. 그러니 이렇게 다양하고 좋은 희곡을 어떻게 저 혼자 보고 말 수 있었겠어요.”
2010년에 국내 초연된 ‘에이미’에 이어 데이비드 해어의 또 다른 작품 ‘스카이라잇’을 번역하게 된 것도 사회 문제를 개인의 삶에 정교하게 녹여낸 작가의 연극관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90년대 중반 보수당의 장기 집권으로 심화한 영국의 세대ㆍ계층 간 갈등을 두 남녀의 이야기로 풀어냈다.
그는 벌써 20년 가까이 매월 40~60편의 희곡을 읽는다. 1990년대 중반 영자신문사 연극 담당 기자 시절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를 통해 느낀 현지 연극의 다양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한 달에 수백 권씩 마구잡이로 대본을 사들이면서 계속 유지해 온 생활습관이다. 소장하고 있는 대본 책만 1만 권이 넘는다.
학생운동이 급진적이고 강력했던 1980년대에 대학생활을 한 성씨는 사회에 순응하며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10대학에 유학을 다녀온 모범생으로서 “연극만이 해방구였다”고 말했다. “대학생 때 선배들에게 꾸지람 들어가며 연극을 정말 많이 봤어요. 그때만 해도 감독의 예술인 영화는 억압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나도 모르는 내 안에서 연극을 선택한 거죠.”
그렇게 뛰어들게 된 연극계이지만 부모님을 비롯해 주변에서는 여전히 그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예전에 하던 전문 통역을 다시 해 보라고 하시고, 어머니는 외국에서 발송되는 대본 택배를 늘 못마땅해하세요. 작품이 재공연되면서 새로운 대본이 나오면 모두 사들이니까 ‘똑같은 대본을 왜 자꾸 사느냐’고 하시죠. 몇몇 장면이 달라지기 때문에 저한테는 모두 다른 대본인데 말이죠.”
연극을 향한 애정이 깊기에 인터뷰 중간중간 연극계에 대한 투정과 불평을 쏟아내기도 했지만 성씨에게 연극은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기쁨을 주는 삶의 보람”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내가 번역한 연극이 누군가의 삶에 약간의 충격을 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은 사회 지도층의 막말이 범람하는 시대지만 적어도 그런 사람이 세상이 많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그게 제가 연극을 통해 배운 교훈이니까요.”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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