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자 담헌 홍대용의 <건정동필담>과 한족 선비 엄성의 <일하제금집>에는 겹치는 내용이 있다. 중국으로 간 조선연행사 일행이 고서적 거리에서 중국의 지식인들과 우연히 맞닥뜨리는 부분이다. 질 좋은 안경을 찾던 비장 이기성은 문인의 기품을 두루 갖춘 한 중국 선비의 안경에 반해 자신에게 팔기를 청한다. 중국어를 하지 못하니 대화는 말이 아닌 붓으로 이뤄졌다. 선비는 가격을 흥정하는 대신 불쑥 안경을 벗어 건넸다. “이깟 안경 하나 아낄 일이 뭐 있겠소. 어찌 팔라고 한단 말인가?” 보란 듯이 앞섶을 날리며 사라진 중국 선비와 그 배포에 감탄하는 조선 학자의 모습은, 전례 없이 애틋하고 끈끈했던 18세기 한중 지식인 교류의 시작이었다.
이 시기 양국 지식인의 교류 실태를 낱낱이 밝힌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이 출간됐다. 저자인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는 경성제국대 교수이자 추사 김정희의 권위 있는 연구자였던 후지쓰카 지카시가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피상적이고 단편적으로만 알려졌던 당시 양국 지식인의 교유를 선명하게 복원했다.
정민 교수가 자료를 모은 경위는 매우 특별하다. 2012년 8월부터 1년 간 하버드 옌칭연구소에 방문학자로 간 그가 옌칭도서관을 방문해서 한 첫 질문은 “여기 후지쓰카 컬렉션이 있습니까”였다. 후지쓰카의 연구 주제는 원래 청조 고증학단이었으나 연구 도중 그들과 교유했던 조선의 학자들에게 마음이 끌리고 말았다. ‘조선은 청조학으로 가는 우주정거장’이라 말했던 후지쓰카는 조선에 머물 당시 조선 문인들의 서적, 서간, 서화, 탁본, 그리고 이들이 청조 지식인과 주고 받은 친필 자료를 1,000점 넘게 모았다. 자료 중 상당수는 1945년 도쿄 폭격으로 소실됐지만 일부는 살아남았고 옌칭도서관이 그것을 사들였을 것이란 추측이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 돌던 중이었다.
그러나 도서관 사서의 대답은 “후지쓰카가 누구냐”였다. 적잖이 실망한 정 교수는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으나 두 달 후 우연히 빌린 엄성의 문집 <철교전집> 필사본이 후지쓰카의 전용 원고지에 쓰였다는 걸 알게 됐다. 옌칭도서관은 이 책을 중국 고서로 분류했을 뿐 이를 필사한 이가 후지쓰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여느 수집가들과 달리 소장서에 장서인을 찍는 일이 거의 없었다. 60여 년간 잠들어 있던 보물이 다시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정 교수의 후지쓰카 컬렉션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그는 후지쓰카의 전용 원고지, 필체, 제본 방식, 교정 방식 등을 기준으로 후지쓰카의 자료들을 집요하게 모아 나갔다. “나중엔 서가를 지나치기만 해도 후지쓰카 냄새가 났다”는 정 교수는 1년 간 60종 200책의 자료를 모았다. 그는 수장고에 있는 것까지 합치면 “못 돼도 200종은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남은 일은 수집한 자료와 이미 알려진 사실을 놓고 대차대조표를 그리는 것이었다. 홍대용이 초석을 놓고 박제가가 꽃을 피운 한중 지식인들의 커뮤니티는 생각보다 훨씬 방대하고 조직적이며 끈끈했다. 정 교수는 “기존 연구가 ‘조선의 누가 중국의 누구와 친했다더라’ 정도에 그쳤다면 이번에 발견된 자료들은 하나의 만남이 가지를 치며 확산된 경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며 “양국 지식인들이 서로의 문예에 감탄하며 대등한 위치에서 교류했던 사실도 일방적 주장이 아닌 객관적 근거를 얻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미국을 떠나기 전 옌칭도서관 측에 후지쓰카 구장서에 출처를 표시해달라고 요청했다. 현재 도서관 검색엔진에 후지쓰카의 이름을 검색하면 56개의 항목이 뜬다. 옌칭도서관에 비로소 후지쓰카 컬렉션이 만들어진 셈이다. “이 책은 널려 있던 구슬을 하나로 꿰 맞춘 것에 불과합니다. 18세기 문예공화국이 양국, 나아가 동양의 문예사조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밝히는 것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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