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메이져를 치면 늘 그녀가 입던 초록색 점퍼가 생각이 난다 / F#마이너를 치면 왜 그녀 집으로 가던 육교가 떠오를까 / 한동안 다른 코드를 칠 수가 없다 그래도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지 않은가 / A D G 왜 이렇게 숨이 찰까”
김창완밴드가 2년여 만에 발표한 신곡 ‘E메이져를 치면’은 휘파람 부분을 빼면 선율이 없이 화성과 리듬, 내레이션으로만 이뤄진 노래다. 노랫말 그대로 E메이저(미솔#시) 코드로 시작해 F#m-A-D-Bm-G-D-G-Em-A로 이어진다. 기타를 처음 치는 사람이라도 금세 외워서 짚을 수 있는 기본 코드들이다.
최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지하 연습실에서 만난 김창완(60)은 매일 오전 9시부터 2시간 동안 진행하는 SBS 파워FM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2000년~) 방송 도중 즉흥적으로 만든 곡이라고 했다. “그날 따라 E메이저를 둥 치는데 왜 그런 소리로 들렸는지 모르겠어요. 왜 그게 사랑의 그리움에 대한 실마리가 됐는지도요.”
‘E메이져를 치면’과 함께 디지털 음원으로만 발표한 신곡 ‘괴로워’도 사랑의 추억을 노래하는 곡이다. “너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내 행복쯤은 불쏘시개가 돼도 좋았지”라고 말하는, 간결한 록 넘버다. 2008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밴드를 이끌어 오면서 산울림 시절과 달리 사랑 노래를 즐겨 만들지 않았던 그가 갑자기 사랑을 추억하는 노래들을 내놓은 건 왜일까. “사람들이 일상적인 사랑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알고 보면 사랑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것, 알 수 없는 것인데 말이죠. (설치미술가 장지아의 작품을 보여주며) 이건 태형을 가할 때 쓰는 도구인데 보석으로 장식했고, 이건 쇠로 만든 하이힐이에요. 이렇게 아름다운 게 채찍이 되고 형구(刑具)가 돼요. 사랑의 모습이 혹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한편으론 내겐 어떤 사랑이 있었고 지금 그 사랑을 체험하고 있는지, 그런 떨림은 어디로 갔는지 질문하는 곡이기도 해요.”
공식 음원으로 내놓진 않았지만 ‘노란 리본’이란 곡도 최근 발표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곡이다. 그는 “슬픔에서 헤어나오기가 힘들었고 어른으로서 죄책감이 매우 컸다”며 “우선은 나 스스로를 구해내려고 만든 노래인데 만들고 나니 위로보다 희망을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창완은 강박적으로 곡을 쓰고 연기하는 타입이 아니다. 괜찮은 단상이 떠오르면 느긋하게 ‘그냥, 쓰지 뭐’ 하는 식으로 곡을 써내려 가고, 연기할 때도 대본을 분석하고 뭔가를 설정하기보다 ‘그 신(scene)이 원하는 것’을 표현하려 한다. 라디오 프로그램 대본은 작가와 함께 직접 만드는데 대부분 방송 5, 6분 전에 쓰기 시작한다. “순간에 완성되는 뭔가가 있어요. 그런 습관이 어떤 사물을 보는 관점이나 내 반응을 새롭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예술에서 즉흥성을 배제할 순 없죠. 삶이란 게 원래 날숨과 들숨 사이에 있다잖아요.”
1977년 ‘아니 벌써’로 데뷔해 37년째 음악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말 그대로 팔방미인이다. 한국 록의 정점에 오른 음악가인 동시에 ‘별에서 온 그대’ ‘밀회’ 등 수십 편의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한 배우이고 소설가이자 동시를 쓰는 시인이다. 산울림의 앨범 커버에 담긴 그림들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신곡 ‘E메이져를 치면’의 뮤직비디오도 직접 연출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자신에게 열정이 사라졌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안에 사라진 게 뭘까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메말라가는 정열, 사라지는 열정인 것 같아요. 예전보다 두려움이 많아진 것 같아요. 조각을 모르면서도 나무를 갖다 놓고 깎고는 했는데 이젠 그런 열정이 없어요. 왜 그렇게 겁이 많은지. 그래도 동시를 쓸 땐 행복해요. 좀 후련한 느낌이 들죠. 많이 써놨는데 책으로 내려고 준비 중입니다.”
세 개의 신곡은 김창완의 음악적 감수성이 그리 녹슬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는 증거물이다. 그는 ‘어떤 음악을 할까’보다 ‘왜 음악을 하지’라는 질문을 더 자주한다고 했다. 그래서 물었다. “저는 이런 걸 하려고 한 적이 없는데 어느 날 가수가 됐어요. 가수로 데뷔하고 나서도 10년 동안 가수라고 이야기를 못했어요. 지금에 와서 왜 노래하냐고 묻는다면….외로워서? 두려워서? 나는 왜 천형 같은 이 짓을 하는가. 그건 두려움, 더 구체적으론 잊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겠죠. 그리고 내가 나를 모르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불안함, 그것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싶어서가 아닐까. 내 삶에서 내가 왜 소외돼 있는지, 나 자신과 내가 잘 모르는 나 사이의 간극을 메워 주려고? 소외시킨 나에 대한 속죄로? 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하하”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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