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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눈치만 보는 관료들

입력
2014.05.2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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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하순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모습. 국무위원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말을 받아 적는 데 여념이 없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작년 10월 하순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모습. 국무위원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말을 받아 적는 데 여념이 없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 달 넘게 공들여 준비한 경제혁신 3개년 계획 대통령이 직접 발표하며 내용이 완전히 탈바꿈 靑이 고위직 인사권 가져 靑 눈치 안 볼 수 없어 소명의식 갖고 일한 공무원 결과 나빠도 보상해 줘야

“VIP(대통령)의 뜻이니….”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정리됐다. 거의 모든 부처가 한날 넘게 매달려 휴일을 반납하고 야근을 밥 먹듯 했다는 공치사가 민망해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관련 담화 1주일 전 경제부처 고위 관료가 사전브리핑을 빌어 기자들 앞에서 66페이지에 달하는 100대 과제를 2시간 가까이 설명할 때만해도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결국 우리 경제 혁신을 3년 안에 이루겠다는 대통령의 바람을 온전히 담지 못한 죄만 남았다. “백화점 식이라는 안팎의 지적이 많았다. 그래도 일부 가감이 있을 뿐 큰 틀에서 달라진 건 없다.” 애초 대통령의 요구 자체가 무리였다는 반박은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은 그렇게 대통령의 작품으로 남았다. 100대 과제는 25개로 줄어들었다가 다시 59개로 늘어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어떤 게 빠지고 들어갔는지 공무원들도 헷갈릴 정도다.

사실 경제혁신 3개년 계획 입안 과정을 살펴보면 해당 부처 공무원들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했다. 박 대통령이 1월 6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3개년 구상을 밝힌 이후 해당 부처 공무원들은 ▦기본 방향 설정 1주일 ▦부처별 작성 지침 및 정책 마련 15일 ▦실행과제 선택 1주일 ▦언론사 관계자 사전브리핑 등 무서운 속도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양이 많아 3개년 책자를 찍어내는 데만 며칠이 걸릴 정도였다. “우리 경제의 모든 문제점과 나아갈 바를 망라한 백과사전”(기재부 고위 관계자)이란 자화자찬이 과장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2월 22일까지는 그랬다.

순조롭던 일이 어그러진 건 발표 당일인 2월 25일 오전, 담화 주체가 경제부총리에서 대통령으로 갑자기 바뀌면서부터다. 자신만만하던 부처 분위기는 우왕좌왕으로 180도 바뀌었다. “우리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 “그 내용은 안 빠진 것 같은데, 빠졌다고?” “100대 과제와 25개의 차이점은 지금 파악 중” 등 답답한 상황이 계속 됐다.

결국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며칠 뒤 사후 브리핑을 통해 에둘러 해명을 했지만 공직사회는 이미 깊은 내상을 입었다. “대통령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게 문제”라는 자조가 쏟아졌다. 곧 나온다던 3개년 책자의 행방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짧은 기간 부담에 치이다 보니 꺼냈던 서랍 속 대책은 다시 슬그머니 서랍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언제고 다시 써먹을 날을 위해.

한 공무원의 얘기다. “국민들은 쉽게 서랍 속 대책이라고 평가절하하는데, 정책이란 게 하늘아래 새로운 게 없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정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지만 정작 시간은 주지 않는다. 고민 끝에 파격적인 걸 내놓아도 위에서 걸러진다. 책임질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는 “전 정권 때 퇴짜맞은 보고서를 꺼내 각 항목의 영어 앞자리를 따 그럴싸한 영어 단어로 제목을 다시 꾸몄더니 무사통과 된 경우도 있다”고 털어 놓았다.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1990년 이후 정치지도자들이 새로운 시대에 맞는 성장모델을 만들기보다 박정희 식 성장모델을 그대로 추종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11년째 표류 중인 국가재난안전무선통신망 구축사업 지연 사태를 보면 관료사회가 얼마나 책임을 싫어하는지, 보신주의가 몸에 뱄는지 확인할 수 있다. 당초 이 사업은 박근혜 정부의 국정과제에도 포함됐지만, 2년 가까이 제자리 걸음이다.

국가재난안전무선통신망은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이후 경찰 소방본부 군 등 재난 수습 관련 공공기관의 무선 및 교신 방식을 일원화하자는 취지로 도입 논의가 시작됐다. 그러나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예비타당성 조사를 두고 업무 특성상 경제성만 따질 사안이 아니란 반론이 엉키면서 겉돌았다. 총대를 메는 관료가 아무도 없으니 일이 진척될 리 없다. 세월호 참사 이후 박 대통령이 조기 도입을 촉구했다지만 관료들은 여전히 청와대만 바라보고 있다.

더구나 세월호 참사 이전 정부 재난대응시스템상 사각지대와 컨트롤타워 부재 문제를 지적한 각종 정부 용역 보고서가 존재했지만 실제 정책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누구 하나 앞에 나서지 않고,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청와대의 눈치만 살펴 대책을 급조했기 때문이다. 참사 이후 쏟아지는 각종 제안들 역시 비슷한 경로를 거치지 않으리라는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관료사회의 보신주의는 직업윤리를 따지기 앞서 현실적으로 인사와 연결돼있다. 사실상 청와대가 부처 고위 관료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상황이라 정책을 내더라도 청와대의 의중을 살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인사라는 게 위부터 아래까지 연쇄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공직사회 전체가 영향권 안에 든다고 볼 수 있다.

공무원 승진 적체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갈수록 심해지면서 관료들은 자리 보전과 승진을 위해 정치권 줄서기에 나서고 결국 정치적 중립성이 훼손되는 등 꼬리를 물고 각종 문제가 파급되고 있다. 5년마다 정권이 바뀌고 4년마다 지방자치단체장이 선거로 교체되니 책임질 일은 미루고, 파격적인 정책보다는 서랍 속 대책을 선호하는 악순환도 형성되고 있다. 여기에 감사원이나 감독기관들의 지나친 간섭이나 책임 추궁도 적극적인 업무 추진이나 위험을 회피하려는 행태를 초래하고, 잦은 순환보직은 면피할 변명거리를 안겨준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소명의식을 갖고 나섰다가 결국 모든 책임을 다 져야 하는 공직사회의 잘못된 시스템을 깨기 위해서는 결과가 나쁘더라도 과정에서 노력했다면 그것만으로 보상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성수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먼저 나서는 사람이 평가 받도록 보상 체계를 만드는 일은 결국 제도 운영자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강조했다.

허만형 중앙대 행정학과 교수는 “장관이 전문성이 부족한 것도 문제”라며 “전문가 장관을 임명해 대통령 권한을 줄이고 재량권을 충분히 줘야 관료 사회도 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임도빈 서울대 교수는 “승진이 어느 정도 보장될 수 있도록 장기적인 관점에서 공직자 채용 계획을 다시 짜야 한다”고 말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김민호기자 kimon8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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