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쓰다 보면 한번쯤 맞닥뜨리는 공포의 단어가 있다. ‘포맷’(Format)이다. 컴퓨터 속 하드디스크를 다 갈아엎어서 처음부터 새롭게 설정을 해야 한다는, 이젠 보편화된 용어다. 포맷이 지닌 기술적 의미를 깊고 넓게 알고 있지는 않으나 “포맷해야 합니다”라는 전문가의 말을 들으면 몇 가지 상념들이 몰려오기 마련이다. “내 파일들은 어떻게 보존 처리해야 할까?” “포맷하는 동안 컴퓨터 작업은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컴퓨터를 오래 쓰는데 문제가 되진 않을까?”… 물리적 손실에 대한 여러 걱정은 결국엔 포맷이 최악을 피하기 위한 최종적인 선택이라는 걸 암시한다.
지난해 문득 박근혜 대통령의 강경한 대북 자세를 보며 엉뚱하게도 이 공포스러운 단어 ‘포맷’을 떠올렸다. 박 대통령이 개성공단 폐쇄를 불사하며 대북 협상에서 주도권을 쥐었을 때(또는 쥐었다 생각하고 있을 때) 박 대통령은 손해보지 않을 게임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성공단이 장기 폐쇄되고 남북 관계가 경색돼도 언제가 남북은 대화를 하게 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원점에서 새롭게 논의하게 된다면 전임 대통령들이 간난신고로 이룬 대북 업적들은 다 묻히기 마련이라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북을 향한 굳은 자세만으로도 보수파의 든든한 지지를 얻을 것이 당연했고, 큰 무력충돌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웬만한 대북정책은 박근혜표로 신장개업할 수 있다고 봤다. 본능에 의해서인지 정밀한 계산에 의한 것인지 적어도 정치적 셈법에 있어서 박 대통령은 탁월하다고 여겼다.
따지고 보니 박 대통령은 ‘포맷의 여왕’이었다. 기존 틀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지도력과 지지를 확보했다. 2003년 차떼기당으로 한나라당이 벼랑 끝에 몰렸을 때 그는 당사를 천막으로 옮기며 ‘당의 기억장치’를 뒤엎었다. 최근엔 세월호 대참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해양경찰청의 해체를 선언했다. ‘국가 개조’라는 단호한 용어도 곁들였다. 포맷이란 컴퓨터 용어가 좀 더 선연하게 느껴지는 조치였다.
돌이켜보건대 포맷정치는 국내 현대 정치사를 이끌어온 주요 ‘정치 기법’이었다. 완력으로 정권을 뒤엎거나 체제를 무너뜨리는, 비민주적이나 편의적인 방식으로 곧잘 사용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특히나 애호가였다. 첫 집권 과정부터 포맷 기술을 활용했다. 5ㆍ16이었다. 선거로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는 ‘갈아엎기’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했다. 10월 유신으로 자신이 설립한 제3공화국을 제4공화국으로 변환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포맷’으로 자신을 국가원수로 만들 체제의 기반을 형성했다.
철권 통치자들의 주도로 만들어진 국가재건최고회의나 비상국무회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등을 통해 혁명적인 정책들이 재건과 비상을 이유로 집행됐다. 국가가 위기에 놓여있다는 전제로 자유로운 논의와 투명한 의견수렴이라는 민주적 절차가 생략됐다. 국민 각자의 삶은 무시되고 집단으로서의 국가 번영만 강조됐다. 포맷 정치의 해악이다.
포맷 정치는 정략적인 측면이든 국가적 차원이든 위기 돌파엔 제격이다. 충격 요법이 만들어내는 메시지 전달 효과도 크다. 극단적인 처방이 늘 그렇듯 후유증도 따른다. 60년 넘는 이력을 지닌 국가기관이 대통령의 결단으로 단번에 사라진다. 해경 해체에 대한 논의는 아예 설 자리가 없었다. 21세기 민주주의 국가의 정책 결정이라고 하기엔 퇴행적이다.
컴퓨터를 포맷하면 한번쯤 자신의 컴퓨터 관리법을 되돌아 보게 된다. 백신프로그램을 제대로 사용했는지, 아무런 웹사이트나 함부로 드나들지 않았는지…. 컴퓨터 포맷을 할 때 운영체제까지 바꾸는 경우도 드물다. 검증되지 않은 다른 운영체제의 사용에 대한 두려움과 기존 운영체제의 업그레이드 비용이 운영체제 변경을 막는다. 국가 개조도 좋지만 기존 체제의 운영 방식에 대한 성찰도 필요할 때다. 요란스레 포맷만 하고 깊은 성찰 없이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은 똑같다면 위기는 반복된다. 포맷 정치만으로 우리의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다.
라제기 문화부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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