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극강(以柔克剛).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이긴다는 뜻이다. 시속 160km의 광속구를 담장 밖으로 넘겨 버리는 능력. 물 흐르듯 이어지는 타격 폼에 있다. 메이저리그 왼손 거포 켄 그리피 주니어(45)는 이런 부드러움의 대명사다. 시애틀, 신시내티 등에서 뛰면서 ‘가장 아름다운 스윙’이란 찬사를 들었다. 켄 그리피 주니어는 22년 간 2,671경기를 뛰면서 630개의 홈런을 남겼다.
국내 무대에는 이승엽(38ㆍ삼성)이 있다. 전성기 시절 스윙 스피드가 150km까지 나왔던 전형적인 ‘이유극강’의 거포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승엽이 학창 시절 켄 그리피 주니어를 동경했다는 것. 한일 통산 600홈런(현재 525홈런)에 도전 중인 그가 요미우리에서 25번을 단 것도 이 때문이다. 25번은 마크 맥과이어, 배리 본즈, 켄 그리피 주니어 등에 있던 번호다.
이처럼 이승엽은 켄 그리피 주니어를 좋아했고 따라 했다. 연구했고 배웠다. 그리고 불혹을 앞둔 지금도 ‘국민 타자’는 켄 그리피 주니어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 이승엽은 26일 현재 타율 3할1푼3리에 8홈런 30타점을 기록 중이다.
●타격폼의 변신, 세월과 타협하다.
이승엽은 올해 세월과 타협했다. 파워도, 순발력도 예전과 다르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지나간 시간은 타격폼을 바꾸라 했다. 무뎌진 반응 속도는 변화를 요구했다. 이승엽은 꼿꼿이 세우던 방망이를 어깨에 눕혔다. 90도 가까이 들던 오른 다리도 살짝만 올렸다. 김한수 삼성 타격 코치는 “타격 준비 동작을 대폭 줄였다. 빠른 공에 대한 대처 능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변신은 켄 그리피 주니어와 꼭 닮았다. 1996~2000년 무려 249홈런을 폭발한 그는 2002~2004년 부상 등의 이유로 38홈런에 그쳤다. 서른 다섯 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주위에서는 “한 물 갔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켄 그리피 주니어는 2005년 128경기 35홈런 92타점으로 내셔널리그 올해의 재기선수상을 받았다. 2006년 19홈런 72타점, 2007년 24홈런 93타점 등 활약은 계속 됐다. 켄 그리피 주니어는 방망이를 까딱까딱 흔드는 특유의 폼은 유지하면서도 이승엽과 같이 배트를 어깨 쪽으로 조금 눕혔다. 나이 든 슈퍼스타의 ‘쿨’한 인정이었다.
송재우 MBS SPORT+ 해설위원은 “아마추어 시절부터 켄 그리피 주니어는 홈런을 치는 능력이 탁월했다. 투수가 던진 공에 백스핀을 걸어 엄청난 비거리를 보이곤 했다”며 “스윙은 크면서도 부드러웠다. 자세는 곧게 유지하면서 불필요한 동작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이승엽의 은사 박흥식 롯데 타격 코치도 “켄 그리피 주니어의 말년 시절 타격폼을 보라. 이승엽과 거의 흡사하다”며 “(이)승엽이가 정말 옳은 결정을 한 것 같다. 다시 타석에서 위압감을 주는 타자가 됐다”고 밝혔다.
●홈런 패러다임을 바꾸다
올해 이승엽의 부활이 더 놀라운 사실은 기술적으로, 순간 대처 능력으로 홈런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승엽은 지난 21~22일 포항 롯데전에서 3개 아치를 그렸다. 지난 21일 왼손 에이스 장원준으로부터, 다음 날에는 김사율의 체인지업을 잡아 당겼다. 장인 같은 기술을 보여준 것은 22일. 바깥쪽으로 흘러나가는 변화구를 손목 힘 만 이용해 우월포로 연결했다.
하일성 KBS 해설위원은 “가볍게 왼 손을 놔주면서 홈런을 때렸다. 방망이 헤드를 이용해서 장타를 날릴 줄 아는 타자”라고 했다. 다른 구단 선수들도 “보통 홈런을 치기 위해선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데 이승엽은 그런 게 없다”며 “저게 과연 넘어갈까 하는 타구가 항상 넘어간다”고 했다.
류중일 삼성 감독은 “지금 11연승의 수훈 선수를 뽑으라면 마무리 임창용과 6번 이승엽”이라면서 “두 선수가 그라운드 안팎에서 정말 좋은 역할을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류 감독은 “예전의 이승엽은 아니지만 이승엽은 이승엽”이라며 “타석에 이승엽이 들어서면 상대 투수들이 긴장할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함태수기자 hts7@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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