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밤 9시 종로 보신각 앞에서는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세월호 참사 정부 규탄 시위를 벌이는 시민과 경찰들 간에 벌어진 카메라 전쟁이었다. 이날 합법적으로 진행된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적인 사진 채증과 이에 대응한다며 경찰 채증조를 향해 조명을 비춘 시민들 사이에서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다. 여기에 이미 대기하고 있던 신문사 사진기자들과 방송사 카메라까지 끼어들며 일대는 수십 대의 카메라가 난무하는 기묘한 전쟁터가 된 것이다. 도대체 공공의 장소에서 집회 및 결사와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찍는 것은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일까?
1871년, 사진이 발명된 지도 40년쯤 흐른 파리는 다게레오타입이라는 사진 방식으로 증명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이던 시절이었다. 바로 그 해 프랑스대혁명의 대미라 할 수 있는 ‘파리코뮌’이 일어났다. 왕정을 반대하는 파리 시민들 대부분이 들고일어나 거리에는 그들 집에서 사용하던 가구들로 산더미 같은 바리케이드가 쌓였고 그 자랑스러운 변혁의 현장을 사진으로 남겼다. 하지만 일주일간의 전투 끝에 2만 명이 학살당했고 파리코뮌은 붕괴했다. 하지만 더욱 비극적인 사건은 사진으로부터 시작됐다. 경찰들은 당시 찍혔던 사진을 수거해 색출작업에 나섰고 4만 명이 체포당해 사형과 강제 노동, 투옥, 유형 등의 징벌을 받았다. 그리하여 파리코뮌에 반대하던 문호 빅토르 위고조차 이때의 상황을 보고 “누구를 징벌하는가? 파리에 벌을 내리는가? 파리는 자유를 원했을 뿐이거늘!”이라며 분노했다.
세월이 흘러 ‘사진의 사회사’를 전공한 독일 출신의 사진가 지젤 프로인트는 “사진이 국가폭력의 정보로 활용된 첫 사례”라고 한탄했다. 이후로 사람들은 변혁의 거리에서 사진 찍히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이는 자신의 생명과 직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국가는 경찰조직을 이용해 반대자들이나 예비 범죄자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찍어 보관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주민증에 사진을 넣은 것도 프랑스이며 이는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 혁명가담자나 깡패 매춘부 등이 그 대상이었다. 지금 우리 주민증에 새겨진 사진은 그런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역시 마찬가지였다. 80년대 중반에도 시위학생들을 찍던 사진 채증 경찰이 있었다. 시위 현장에서 연행돼 경찰서에서 발뺌하려고 하면 담당 형사는 수십 장의 사진 뭉치를 책상에 던지면 “이거 너잖아.”하곤 했다. 물론 당시는 필름 사진 시대였고 그것을 분류하려면 수작업으로 꽤 고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디지털 사진 시대는 그렇지 않다. 사진 이미지에 새겨진 사람의 얼굴을 자동으로 인식하고 분류하는 영상판독 시스템은 흔해졌다. 페이스북만 해도 친구들의 얼굴을 자동인식해 태그를 달아 분류해준다. 한국의 경찰은 이미 그런 시스템을 오래전 도입해 시위현장에서 채증한 사진으로 거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오고 있다. 하지만 이는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범죄 혐의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사진을 찍고 저장하는 것은 “중대한 개인정보 침해이자 초상권 침해”라고 법조인들은 말한다. 실제로 우리 대법원은 1999년 “수사기관이 범죄를 수사하면서 현재 범행이 행해지고 있거나 행해진 직후이고, 증거 보전의 필요성 및 긴급성이 있을 경우에만 영장 없는 사진촬영을 허용할 수 있다”고 판결한 바 있다. 이런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최근 집회에서 이뤄지고 있는 경찰의 사진 채증은 불법이다. 하지만 경찰은 이를 무시할 뿐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 사복을 입혀 사진기자처럼 꾸민 후 시민들 사이에 들어가 사진을 찍고 있다. 최근 한 신문의 사진기자에 의해 폭로된 사진에 담긴 인물들은 나 역시 대한문 앞에서 본 일이 있다. 그야말로 비밀경찰의 음험한 냄새가 풍기는 대목이다.
사진이 국가권력의 지배수단으로 활용되는 순간 시민들의 표현자유는 위축되고 자기검열을 할 수 밖에 없다. 개인의 자유로운 기록은 의심되고 사진기자들의 행위는 매우 위험한 부역자의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경찰은 당장 불법적인 사진 채증을 중단하고 기존 자료를 삭제해야 한다.
이상엽 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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