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명목상 군주정치이나 실은 귀족정치다. 영국처럼 출생에 의한, 미국처럼 부(富)에 의한, 러시아처럼 군부에 의한 귀족정치가 아니라 문인(literary) 귀족정치다. …과거제는 가난한 자도 자식의 고위직 진출을 바라보게 해준다. 이 제도를 채택하면 미국에 얼마나 큰 이익이 되겠는가.” 미국 작가 제임스 F. 클라크(1810~1888)가 1869년에 쓴 공자와 중국의 한 대목이다. 아편전쟁 이후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이지만, 과거제는 서구 지식인에게 매력적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 서기 587년 중국 수(隋)나라에서 시작된 과거제는 958년 고려 광종 때 국내에 도입돼 1894년 갑오개혁 때까지 1,000년 넘게 이어졌다. 조선시대 장원 급제자는 왕이 하사한 어사화를 머리에 꽂고 풍악을 울리며 친척 등을 방문하는 축하 행사인 삼일유가(三日遊街)의 영예를 누렸다.
▦ 현대판 과거제인‘고등고시’는 1949년 시작됐다. 정부수립 직후 고시위원회가 설립돼 행정 사법 외무 등 3시(試)를 실시했다. 행시 합격자는 사무관에 임용돼 승진 보장과 막강한 권한을 누렸다. 1970년대에는 20대 군수, 30대 도백이 나올 정도였다. 3시 가운데 사시는 2017년을 끝으로 로스쿨 체제로 완전전환하고, 외시는 이미 외교관 후보자 선발시험으로 바뀌었다. 행시는 2011년 5급 공채로 명칭은 달라졌지만, 학력과 연령 제한이 없는 하나뿐인 고시로서 위세와 인기가 여전하다. 한중일 3국에만 있다.
▦ 박근혜 대통령이 2017년까지 고위직을 행시와 민간 출신으로 반반씩 뽑겠다고 밝힌 이후 논란이 분분하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험을 하나쯤 남겨둬야 한다”“고시가 없어지면 권력자나 상류층 자제만 알음알음으로 채용되는 현대판 음서(蔭敍)제가 부활한다”는 반대론이 적지 않다. 하지만 현직은 물론 퇴직 후에도 끼리끼리 챙기는 폐단이 도를 넘었다. 갈수록 다양화, 복잡화하는 사회변화 흐름을 외면할 수도 없다. 공직 직군과 직렬을 수백 가지로 세분화, 각계 전문가를 수시로 뽑는 선진국형 충원시스템 정착이 불가피하다.
박진용 논설위원 hub@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