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견 황량하기 그지없는 무대다. 전면의 밋밋한 벽, 좌우로 긴 벤치 하나씩. 이것이 무대의 전부다. 그러나 그 속에 많은 사건들이 펼쳐지고 객석을 판타지로 몰고 간다, 무대 소품과 장치의 기민한 변용 때문이다, 극단 로가로세의 ‘야간여행’은 공간의 연극적 활용이 인상적이다.
전면의 벽은 영사막이 됐다가, 미닫이가 열리면서 필요에 따라 새로운 공간으로 거듭난다. 등을 객석으로 돌린 채 각각 의자에 앉은 두 사람 앞에 고속도로의 동영상이 거대하게 펼쳐지면서 무대는 순식간에 차의 내부로 변한다. 왕년의 거물 배우, 그의 자서전을 쓰기로 한 대필 작가, 노배우의 젊은 부인, 그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가정부 등 흔한 대중소설적 구도에 심리적 갈등, 살인을 불어넣으면서 소극장 공간을 변신시킨다.
객석의 코앞까지 와서 펼치는 연기가 인상적이다. 연출자 최무성(47)씨는 “섬세하고도 진솔한 심리 묘사에 주안점을 두었다”며 “볼거리들에 밀려 심리 드라마가 퇴색하는 가운데, 욕망의 움직임을 전면에 내세워 그것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는 즐거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무대에서 배우가 보여지는 연극이라는 자신감이다. 객석 코앞에서 무대의 후면까지 공간을 샅샅이 활용하는 이 연극은 점점 퇴색해 가는 공간의 의미를 새삼 일깨운다.
이 작품은 독일 작가 얀 코스터 바그너의 소설을 희곡화한 것이다. 신춘문예 희곡 당선자 출신인 염지영이 동명의 심리 스릴러를 두 달 작업 끝에 대본으로 바꿨다. 염씨는 “심리의 다면성을 더 잘 들여다 보게 된 계기였다”면서도 “(각색을)오래 하다 보면 남의 이야기에 기대는 타성이 생길 것 같았다”고 말한다. 오는 7월 상연될 자작 희곡‘냄새 풍기기’는 탈출에 성공했다는 신호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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