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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음악가의 음악회 나기

입력
2014.05.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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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회 아침, 눈을 뜨자마자 속삭였다. “올 것이 왔구나.” 이불을 개면서도 생각했다. ‘내일 아침으로 점프했으면 좋겠어.’ 샤워를 마치자마자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뚱어리로 악기 앞에 앉았을 땐 이렇게 뇌까렸다. “정신줄을 놓지 말자.” 연주가 어젯밤만 같지 않다. 심지어 한 번도 막히지 않던 곳에서 헤매자니 미칠 노릇이다. 보면대에 얼핏 비친 웬 산발한 여자의 모습에 지레 놀라기도 했다. 막판 연습을 휘몰아치고 매무새를 단정히 연습실을 나서는데, 뒤통수에 어떤 염력 같은 것이 느껴진다. 피아노로 다시 돌아가 속삭였다. “걱정 마, 잘하고 올게.

나의 경우, 대한민국 음악계에서 ‘피라미드의 중간층’을 형성하는 보통의 음악가라 할 수 있다. 1년에 한 번씩 독주회를 거르지 않는 것이 음악가로 살아갈 자격의 마지노선이라 여겨 왔다. 이렇다 할 매니저가 없으니 스스로 모든 것을 관장해야 한다. 공연장 대관을 승인받고,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음악회를 홍보하는 등등. 연습시간을 쪼개가며 우편으로 배송할 음악회 전단의 우표를 일일이 붙일 때는 팔이 두 개쯤 더 있으면 좋겠다고 엄살을 떨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진행의 모든 경비를 그간 금싸라기 같이 모아둔 적금을 들이부으며 쾌척해야 한다.

연주 직전 대기실, 객석의 맨 앞 두 줄을 부득이 오픈하겠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성황리에 몰려든 청중을 생각하면 가슴 벅차지만, 연주의 집중도를 감안하면 힘 빠지는 일이다. 무대에선 청중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집중에 방해받지 않을 물리적 거리가 필요한 셈이다. 모니터에 하나둘씩 입장하는 객석의 모습이 비치기 시작했다. 거세게 발광하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지금이라도 안정제를 삼킬 것인가를 고민했지만, 일단 7열 7석을 의지하며 버티어 보기로 한다.

무대로 향한 문이 활짝 열리자 무대감독이 억지로 등을 떠밀었다. 350여명의 박수가 한 몸에 내리꽂힌다. 악기를 향해 걷긴 걷되 이 응집된 시선과 기운을 받아낼 만한 맷집이 넉넉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한다. 끼와 깡으로 무장해야 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무대란 곳은 잔혹하게도 평소의 나약한 습관이 압축되어 폭로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쯤이면 되겠지.’라 안일하게 연습했던 부분에서 여지없이 우당탕 구르고 널브러지는데, 온몸의 근육이 의기소침하게 오그라든다. 머릿속에선 두 개의 목소리가 격렬히 대립한다. “괜찮아, 침착해.” Vs.“야, 이래서 마지막 곡까지 무사히 버틸 수 있겠냐!”

연주 중간중간, 해설을 곁들이며 청중의 이해를 도왔다. 물론 ‘연주자는 오롯이 연주로 자신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료도 있다. 나로선 두 배는 더 손가락이 빠릿빠릿 돌아가는 그 동료를 부러워할 뿐, 우둔한 손가락을 상쇄하기 위해서라도 청중에게 더더욱 친절히 설명하는 편이다. 하지만 연주할 때 활성화되는 두뇌 부위와 설명할 때 쓰이는 부위는 엄연히 다르다. 이 둘 사이를 스위치로 온오프 하듯 쉽사리 오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프로그램을 왜 이렇게 구성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각 곡을 관통하는 공통의 음형을 발췌 연주하며 입체적 맥락을 전달하려 노력했다. 특별히 이번 연주회엔 해설 외에도 ‘영상’이란 장치를 적극적으로 개입시켰다.

이날, 드뷔시의 ‘가라앉은 대성당’과 리스트의 ‘물 위를 걷는 성 프란시스’를 마지막 순서로 연주하며 진도 앞바다란 표제를 달았다. ‘수몰’과 ‘기적’을 상징하려는 의도였던 셈이다. 그리곤 조심스레 관련 영상을 띄웠다. 은유와 직설 사이 절묘한 지점을 택하고 싶었는데, 청중의 반응 역시 다양했다. 누군가는 영상이 음악을 압도했다 하고, 누군가는 영상으로 음악이 힘을 얻었다 했다.

음악회로 얻은 물리적 결과는 찬란하다. 3kg을 감량했으며, 202석의 유료관객을 들였는데도 266만원의 적자가 남았다. 누군가 물어왔다. 왜 매번 이 푸닥거리를 감내하는가. 대한민국 음악계의 건강한 중간층을 형성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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