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사상 전향을 강요 받다가 옥중에서 사망한 비전향 장기수들의 유족에게 국가가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는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5부(부장 이성구)는 권오금씨 등 비전향 장기수 4명의 유족 8명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는 유족들에게 총 5억9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고 22일 밝혔다.
일제가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사상전향 제도는 한국전쟁 이후 좌익 인사들에게 물리적 폭력을 동원, 사상을 바꾸는 전향서를 작성해 공개 선언하도록 하는 것으로 변질됐다. 이후 박정희 정권은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비전향 좌익수형자들을 대상으로 사상전향 제도를 본격적으로 운영했다.
당시 박 정권의 지시를 받은 교정당국은 전향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급식, 면회, 운동시간 등에서 불이익을 주고 가석방 기회를 원천 차단했다. 또 폭행과 고문, 질병 치료 거부 등으로 전향 거부자들을 압박하고 가족을 동원해 전향하도록 회유하기도 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전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권씨는 당시 심각한 고혈압을 앓았지만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수시로 불려가 전향을 권유 받았다. 그는 1972년 2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 10시간이 넘도록 방치됐다가 결국 사망했다.
나머지 사건 당사자인 최한석씨, 김대석씨, 이상율씨도 각각 국보법이나 국방경비법 위반 혐의로 중형을 선고 받고 교도소나 보안감호소에 수감돼 사상전향을 강요 받다 숨졌다. 유족들은 2010년 6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정부가 사상전향 공작 과정에서 위법한 공권력 행사로 인권을 침해했다”고 결정하자 2012년 12월 소송을 냈다.
이번 판결은 사상전향 제도 피해 관련 손해배상의 소멸시효 기산점에 대한 최근 대법원의 판단에 따른 것이다. 대법원은 지난 2월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면서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는 2010년 과거사위가 진실규명 결정을 했을 때부터 계산해야 한다”며 “국가가 사상전향 제도가 완전히 사라진 2003년 7월부터 따져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을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를 근거로 “사상전향 제도는 수형자들의 사상적 판단에 대한 표현을 강제하는 것으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불법 행위”라며 “정부는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배상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사상전향 제도는 위헌 논란 끝에 1998년 7월 폐지됐다. 이후 전향서 대신 준법서약서를 작성하는 제도가 신설됐으나 이 제도 역시 2003년 7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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