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사회주의 동맹국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순탄치 않았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기싸움부터 팽팽했다. 스탈린은 중국 혁명을 ‘사회주의나 민주주의와 관계 없는, 굶주린 수백 만 농민들의 봉기’ 정도로 일축하며 애써 마오쩌둥을 폄하했다. 중국 국공내전 중엔 심지어 국민당의 장제스를 지원하기까지 했다. 마오쩌둥 역시 스탈린이 소련의 패권을 위해 중국의 분열과 약화를 추구한다고 보고 그를 불신했다.
▦ 두 지도자 간 원초적 불신과 견제는 양국 공산당 간 이념 갈등으로 증폭되기도 했다. 스탈린 사후 10년 만에 벌어진 ‘중소논쟁’(1963)에서 중국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의 ‘미ㆍ소 평화공존론’ 등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하며 독자노선을 강화한다. 이어 1968년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운동을 억제하기 위해 프라하에 진주하자 소련이 사회주의 간판을 내건 제국주의, 즉 ‘사회제국주의’로 전락했다고 강력 비난했다.
▦ 중국과 소련의 갈등이 정점에 이른 건 이듬해인 1969년이다. 그 해 3월 우수리강 전바오섬(珍寶島)의 영유권을 두고 양국 군 사이에 대규모 무력충돌이 벌어져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무력충돌은 그 해만도 헤이룽장(黑龍江ㆍ아무르강) 일대와 중앙아시아의 신장웨이우얼 자치구로 확대됐다. 4,380㎞에 이르는 두 나라 국경선에 소련군 80만명, 중국군 65만명이 배치돼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도는 상황이 됐다. 중국이 1972년부터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에 나선 것도 중소관계 악화가 크게 작용했다.
▦ 최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중을 계기로 두 나라가 드문 밀월관계를 과시하고 있다. 410조원에 달하는 대규모 가스 수출입 계약이 체결됐고, 무력충돌의 앙금이 남은 헤이룽장에 2016년까지 첫 철교를 건설키로 합의했다. 시진핑 주석은 푸틴 대통령의 지지에 힘 입어 아시아 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를 아시아 안보협력기구로 개편하자는 구상을 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및 남중국해 분쟁 국면에서 ‘반미(反美) 연대’를 구축하는 셈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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