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삶의 공허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기치료적 탈주 수단으로서 결국 나 자신을 위해 작품을 만든다. 그러나 평범한 재료, 이미지와 일상 사물을 통해 보는 사람 저마다의 해석을 자극하여 심각한 농담을 하려는 유희적인 소통의 의도는 여전히 남아 있다.”
10년 전 47세로 세상을 떠난 미술작가 박이소(1957~2004)가 남긴 글의 일부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이 결국 쓰레기더미가 되는 것 같다”면서도 이렇게 고백했다. 절박함이 느껴진다.
아트선재센터에서 박이소 개인전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위한 어떤 것(Something for Nothing)’이 열리고 있다. 작품명을 전시 제목으로 가져왔다. 시멘트를 가득 채운 고무 대야와 빈 대야, 허수룩한 나무 받침대로 이뤄진 이 작품은 유실되어 없지만, 그가 추구했던 ‘어떤 것’, 작가 노트에 따르면 ‘무언가를 만들려는 행위와 욕구, 그리고 그 공허함에 대한 고찰’을 잘 드러낸다. 사후 국내 개인전으로는 2006년 로댕갤러리에서 열린 ‘탈속의 코미디’, 2011년 아트선재센터의 ‘박이소-개념의 여정’ 이후 세 번째다.
박이소는 1990년대 초반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 예술담론을 소개하며 한국에선 낯 설던 개념미술을 알리고 정립한 작가다. 평면, 설치, 퍼포먼스를 넘나들며 펼친 개념미술 작업으로 젊은 작가들을 사로잡으며 큰 영향을 끼쳤다. 그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한국 현대미술은 오랫동안 상실감을 겪었다.
6월 1일까지 하는 이번 전시는 설치작품을 중심으로 회화, 조각,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한 40여 점을 보여준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 미국 뉴욕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작업과 1995년 귀국 후 작업을 소개한다. 1990년대 말부터 한국에서 했던 주요 그룹전, 2002년 에르메스 미술상 수상으로 열린 개인전, 2000년 미국 텍사스의 아트스페이스 레지던시 작업,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선보인 작업 등을 볼 수 있다.
전시의 출발점인 ‘As an Escape’는 전시장 벽과 반투명 비닐 사이에 좁은 복도를 만들어 낯선 공간 속으로 관객을 유도한다. ‘당신의 밝은 미래’(2002)는 10개의 강한 조명이 하얀 벽의 윗부분을 때리는 설치작업이다. 너무 밝아서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다. 작가는 ‘밝은 미래’라는 강박의식에 연민을 표시하려 한 것일까. 벽을 향해 열심히 돌아가는, 그래서 제구실을 못하는 선풍기(‘무제’)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다.
박이소의 작업이 던지는 ‘심각한 농담’은 예리하되 따뜻하고 진지하되 위트가 있다. 앉는 자리에 세계지도를 대충 그려 놓은 나무 의자(‘월드 의자’), 허수룩하게 만든 마천루 모형 집합(‘2010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열 개의 빌딩’), 커피ㆍ콜라ㆍ간장으로 그린 흐릿한 별(‘쓰리 스타 쇼’) 등을 보면서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개념미술’로 분류되는 이 작업들을 어떻게 봐야할지 난감하다면, 박이소가 남긴 또 다른 글에서 실마리를 구해도 좋겠다. 장난인지 사기인지 걸작인지 헷갈리는 아방가르드 미술의 의미에 관해 그는 이렇게 썼다.
“경계선 근처에서 모든 것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며’, ‘걸작이면서 쓰레기이기도 하고’, ‘자유롭기 때문에 불안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테두리 안으로 돌아가는’ 이중성과 모호성, 또는 그 왕복운동 자체가 작품의 주제나 내용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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