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 서울 강남역 지하상가의 한 카페에서 ‘바둑 & 컬처 콘서트’라는 조금은 낯선 이름의 이벤트행사가 열렸다.
강남역 지하 3층 신분당선 개찰구 옆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갤러리아르체에서 열린 이 행사는 여자프로기사 조혜연 9단(29)이 바둑해설을 하고 직업가수 겸 바둑방송 진행자 추두엽씨가 중간 중간 노래를 곁들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림과 바둑과 노래가 어우러진 이날 첫 번째 바둑콘서트의 주제는 ‘화합’으로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의 최철한-김윤영팀과 북한의 조새별-박호길팀이 둔 페어대국을 소재로 다뤘다.
처음 시도된 바둑콘서트이기에 진행자나 관객 모두 약간 낯설어했지만 바둑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었기에 분위기는 곧 즐거워졌다. 학생, 주부, 교수, 공무원 등 다양한 분야의 관객 30여명은 편안한 자세로 커피를 마시며 바둑이야기를 듣고 ‘다음 수 맞히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공연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처음이라 무대가 낯설어 관객과의 호흡이 매끄럽지 못했다. 절반가량은 바둑을 전혀 모르는 이들인데 바둑 얘기가 너무 많아서 좀 따분했던 것 같다. 앞으로 이들에게 더 많은 재미를 제공하고 더 많은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것 같다.” 조혜연 9단의 자평이다.
관객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한 참석자는 “바둑 얘기가 어려웠다. 바둑을 모르는 여자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화제가 좀 더 다뤄졌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바둑콘서트는 앞으로 매주 테마를 달리하면서 개최된다. 24일 저녁 7시에 열리는 두 번째 콘서트 주제는 ‘모방과 창조’. KB리그에서 조9단이 박승철 9단과 두었던 흉내바둑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계획이다.
2000년대 초 여류국수와 여류명인을 한 손에 거머쥐고 여자바둑계를 석권했던 조혜연은 2011년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바둑 보급 활동을 펼쳐왔다. 한국관광공사 명예홍보대사, 광진소방서 명예소방관, 국제청소년문화교류연맹 홍보대사. 미 8군 영어바둑클래스 지도사범을 비롯, 각종 바둑동호회 모임과 강의 등 바둑을 알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작년 가을에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에 입학해 매주 월, 목요일 저녁에는 수업을 받아야 하므로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지경이다. 그런 와중에도 고전사활문제집 현현기경과 관자보를 바둑TV 김옥곤 PD와 함께 영어로 번역했고, 다음 달엔 중국에서 ‘조혜연 창작사활문제집’이 발간될 예정이다.
지난 3월부터 이번에 바둑콘서트를 개최한 갤러리아르체에서 바둑카페를 운영해 왔다. 역시 바둑팬인 이종원 갤러리아르체 대표는 “기존의 기원이 가진 낡고 칙칙한 이미지를 탈피해 커피향과 음악이 흐르는 젊은 감성의 새로운 바둑문화공간을 창조하고 싶었다”고 한다. 바둑판 제조업체 육형제바둑의 협찬으로 400평 규모의 널따란 카페 한 쪽에 바둑판세트가 갖춰졌고 조 9단이 상주하면서 지도사범을 맡은 후 알음알음으로 바둑을 좋아하는 이들이 모여들고 있다.
그런데 이달 초부터 조혜연이 국가대표팀에 뽑혀 훈련을 받게 됨에 따라 바둑카페 운영에 약간 차질이 생겼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훈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주간에 상주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궁리하다 바둑콘서트를 기획하게 됐다.
“요즘 프로기사와 바둑팬의 거리가 굉장히 멀어졌어요.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바둑이 살아남으려면 바둑종사자들, 특히 프로기사들이 마음을 활짝 열고 대중에게 한걸음 먼저 다가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과거에는 바둑팬들이 프로기사를 초청했지만 지금은 프로기사가 먼저 팬들을 찾아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바둑콘서트가 프로기사와 바둑팬 사이의 벽을 허물고, 바둑이 딱딱하고 어렵다는 인식을 바꾸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일부에서는 바둑카페가 잘 될 지 걱정을 많이 하시지만 지금은 대중들, 특히 젊은층에게 바둑을 알릴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시도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계속 두드리면 반드시 열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조혜연은 요즘 주로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팬들과 소통한다. 트위터 팔로워가 1,000명이 넘는다. 바둑카페나 바둑콘서트 홍보도 주로 이를 통해서 한다. 이번 바둑콘서트 관객 중 대부분이 SNS를 통해서 소식을 듣고 찾아온 이들이다.
조혜연은 올해 국가대표팀 훈련을 계기로 다시 한 번 승부에 전념하기로 했다. 동호회 지도나 강의들을 대부분 다른 이에게 인계하거나 정리했다. 다만 미8군 강의는 대체인력이 없어 계속 유지키로 했다. 대표팀에서도 이같은 사정을 감안해 목요일에는 오전 수업만 받도록 배려해 줬다.
“이번 국가대표 훈련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요,” 조혜연은 만 11세 11개월에 입단할 정도로 기재가 뛰어났지만 연구생 생활을 거치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해서 입단한 특이한 케이스다. 평소 여러 명이 함께 공부한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번 훈련이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최우선 목표는 연말까지 국가대표팀에서 살아남는 것. 가능하다면 현재 여자 랭킹 4위에서 2위까지 치고 올라가고 싶다. 1위인 후배 최정(18)까지 제치기는 좀 어렵겠지만 비슷한 또래인 2위 박지은(31)과 3위 김혜민(28)은 한 번 따라 잡고 싶다. “그 다음 목표는 그때 가서 말씀드리겠다”며 말을 아꼈지만 아마도 세계대회 우승이 아닐까 짐작된다.
박영철 객원기자 ind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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