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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르 협곡의 파노라마... 이것이 자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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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르 협곡의 파노라마... 이것이 자연이다

입력
2014.05.21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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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피오르 끝 부분에 있는 힐레 마을의 모습. 피오르는 육지 깊숙이 들어온 만이지만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과 섞여 독특한 생태, 그리고 생활 풍습을 보여 준다.무척 깊어서 다리는 거의 없고 사람들은 저 거울 같은 풍경 위로 배를 타고 건너다닌다.
노르피오르 끝 부분에 있는 힐레 마을의 모습. 피오르는 육지 깊숙이 들어온 만이지만 만년설이 녹아내린 물과 섞여 독특한 생태, 그리고 생활 풍습을 보여 준다.무척 깊어서 다리는 거의 없고 사람들은 저 거울 같은 풍경 위로 배를 타고 건너다닌다.

P와 S와 L과 Y(나). 그렇게 넷이서 노르웨이로 드라이브 여행을 떠났다. 평균을 내보자. 나이 44.75세, 체중 79.75㎏, 직장 근속기간 16.5년, 주량 소주 2병, 분당 심박수 75회, 사회적 자존감 중중하. 요컨대, 각각의 평균치를 훌쩍 낮추는 역할을 한 Y가 상당히 억울하지만,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중년 남자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들이, 영문판 론리플래닛에 ‘홀딱 반할(really breathtaking)’ 이라고 묘사된 풍경을 마주할 때마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의 문장이란, 대개 이런 꼴이었다.

“이야, ○○! 이 ○○○들, ○○ 잘해놨네! 으아… 진짜, 이건 뭐 ○○○ ○○…”

서글픈 일이다. 장엄한 대자연 앞에서 주체 못할 감동이 욕설로 삐져 나오고 만다는 사실은. 그건 대한민국 중년 남자의 삶이 지금도 입에 주먹밥을 문 채 총질을 해대던 1950년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일 것이다. 24시간 성난 얼굴로 전진무의탁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들 앞에 펼쳐진, 저 노르웨이의 일상이 어처구니없이 평화로웠다는 뜻도 되겠다. 그리고 미리 밝히는 이 기사의 결론은, 그런 거친(불쌍한) 중년 남자의 눈가에 은은한 곡선이 깃들게 할 만큼의 위안을, 노르웨이가 선물했다는 것이다.

“○○, 이런 처죽일…”

분명히 걸어서 5분이랬다. 렌터카 사무실에서 서류에 서명하고 주차장으로 차를 픽업하러 가는 길. 그러나 직원이 그려준 약도는 알고 보니 추상화에 가까웠고 주차장 간판은 도저히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희미했다. 이러구러 차를 끌고 지하주차장에서 탈출하기까지 대략 50분 걸렸다. 넷 중 혼자만 가고픈 방향이 달랐던 L은 이 때부터 툴툴대기 시작했다. 차는 중형 세단 크기의 해치백. 유럽인들이 좋아한다는 스타일이다. 내비게이션을 켰다가 그냥 껐다. 사실 이들에게 이번 여행은 ‘목적지’가 따로 없었다. 말하자면 중년 남자들의 유쾌(?)한 단체 출분. 참, 출발점이자 도착점이었던 이 도시의 이름은 브레겐이다.

유럽에서 차를 빌릴 여행자를 위한 팁. 인터넷 예약 사이트를 통해 확인하는 값은 대부분 의외로 싸다. 하지만 여기 보험료(일할 계산)가 덧붙고, 운행거리 당 추가요금이 따로 붙는다. 그게 싸지 않다. 그래서 차의 종류보다 ‘옵션’을 꼼꼼히 살피는 게 중요하다. 유종도 확인해야 한다. 차량마다 넣는 기름의 옥탄가가 다르다. 휘발유가 다 휘발유겠지, 했다간 나중에 경을 칠 수도 있다. 잔소리는 이쯤 하자.

뭐니뭐니해도 노르웨이는 피오르(Fjord)의 나라다. 거대한 빙하가 깎아낸 원시의 협곡이 겹쳐지는 세상의 꼭대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대는 이유다. 근데 그건 노르웨이에서 차를 운전하는 일이 한국과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나라에도 고속도로는 있다. 구불구불하다 못해 꼬부랑꼬부랑한 고속도로다. 그래선지 통행료는 없다. 사실 고속도로든 지방도로든 번호 앞에 붙은 알파벳과 지도 위에 그어진 색깔만 다를 뿐 생긴 모양은 비슷하다. 자연을 파헤쳐 가로지르지 않고 막히면 돌아서 간다. 한결 같은 왕복 이차선.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운전대를 잡았다면, 느긋해져야만 한다.

한국에 있었다면 명승이 됐을 법한 풍경이 노르웨이에선 그냥 여염의 배경이다. 송네피오르 북쪽 연안에서 만난 농경지의 풍경.
한국에 있었다면 명승이 됐을 법한 풍경이 노르웨이에선 그냥 여염의 배경이다. 송네피오르 북쪽 연안에서 만난 농경지의 풍경.

“우-와, ○○○들!”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뒷좌석에 몸을 묻고 있던 L. 그가 결국 침을 튀기며 육두문자의 찬미 대열에 동참하고 만 곳은 송네피오르 건너 북으로 향하던 E39번 도로에서 동쪽으로 꺾이는, 아마도 610번 도로 위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거긴 그냥 밭두렁에 붙은 개울가였다.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아내려 거대한 폭포-라고 하기엔 너무 낮은 곳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용출-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건 그 자체도 어마어마했지만, 그런 게 그냥 심상한 동네 풍경이라는 사실이 어마어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이런 데 살다가 딴 나라 가면 얼마나 시시해 보일까…” 걱정인지 질투인지 알 수 없는 그런 모호한 심정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 네 사람의 입가에서 맴돌았다.

북유럽에선 긴 겨울과 여름, 그 사이에 찰나와 같은 봄과 가을이 있다. 하르당에르피오르 북쪽 연안의 지방도로 풍경.
북유럽에선 긴 겨울과 여름, 그 사이에 찰나와 같은 봄과 가을이 있다. 하르당에르피오르 북쪽 연안의 지방도로 풍경.
요스테달스브렌 국립공원 북쪽 60번 도로. 간선도로의 풍경도 무척 서정적이다.
요스테달스브렌 국립공원 북쪽 60번 도로. 간선도로의 풍경도 무척 서정적이다.
노르웨이를 자동차로 달리다 보면 종종 만나게 되는 얼굴. 과속금지 표지판이다.
노르웨이를 자동차로 달리다 보면 종종 만나게 되는 얼굴. 과속금지 표지판이다.

노르웨이 도로지도를 보면 대개 초록색은 고속도로이고 빨간색은 간선도로인데, 그런 것과 상관없이 형광펜으로 칠한 듯 바닥에 밝은 노란색이 깔린 도로 구간이 있다. 세어 보면 모두 18개다. 정부가 지정한 ‘국가 경관 도로’다. 그런데 이 가운데 10개가 스타방에르 남쪽 오그네에서부터 북쪽으론 트론헤임까지 이어지는 피오르 지역에 있다. 피오르 여행 하면 크루즈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유럽의 여행자들 사이에선 피오르가 손꼽히는 드라이빙 코스인 이유다. 길이 좁아 교차로에서 경관 도로를 그냥 지나치기 쉽다. 사각형 갈색 바탕에 하얀색 똬리를 얹어 놓은 듯한 표지판을 기억해 두면 좋다. 경치 좋은 곳이 근처에 있다는 뜻. 길이 그 자체로 거대한 예술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곳에선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출발 전 P, S, Y가 합의한 바는 북쪽으로 노르피오르까지 갔다가 동쪽으로 방향을 꺾어 요스테달스브렌, 요툰헤이넴 국립공원의 산악지대를 넘은 뒤 남쪽 하르당에르피오르를 찍고 돌아오는 것, 그리고 그 동안 L의 투덜거림을 못 본 체하는 것이었다. (L은 자동차 광고로 유명해진 크리스티안순트의 바닷가 경관 도로에 가고파 했다.) 대략 1,000㎞의 동선. 경관 도로 중 6곳, 유럽 최대의 빙하, 12세기 교회들을 거치는 코스였다. 2박3일에 이걸 ‘해치울’ 계획을 노르웨이 사람들이 들었다면 필경 말렸을 것이다. 그들의 눈에 그건 여행보다 작전에 가까웠을 테니까. 하지만 넷은 전쟁과 다름없는 일상에서 막 탈출한 대한민국의 중년 월급쟁이들이었고, 적잖은 돈을 이미 갹출한 상태였고, 눈 앞에 닥쳐오는 피오르의 파노라마는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대서양의 풍부한 해산물로 인해 노르웨이엔 길거리 음식에도 연어와 새우가 흔하다.
대서양의 풍부한 해산물로 인해 노르웨이엔 길거리 음식에도 연어와 새우가 흔하다.

“……예스터데이, 플리즈.”

팁 하나 더. 뭐든 비싸니 각오하는 게 좋다. 원화 가치가 너무 올라서 큰일이라는데, 세계 최고의 물가 앞에서 넷의 주머니는 허무할 만큼 가벼웠다. 주유소에서 파는 햄버거 세트 값이 2만원을 넘어간다. 만든 지 하루가 지난 이월상품이 1만3,000원. 그걸로 주문해 먹었다. 킥킥,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야, 이런 게 맛있을 수도 있구나…’. 숙소를 구한다면 ‘호텔’ 대신 ‘히테(hytte)’를 물어볼 것. 별장이라는 뜻인데 저렴한 값에 숙소로 빌려주기도 한다.

스트린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잠을 자고 노르피오르의 거울 같은 수평선의 반영을 지나니 길이 오르막으로 변했다. 노르웨이는 위도가 훌쩍 높지만 멕시코 만류의 영향으로 기온은 한국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온난하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익히 아는 피오르의 풍경과 상당히 거리가 있는 또 다른 노르웨이의 웅장함을 만날 수 있었다.

15번 도로를 타고 가다 경관 표지판이 있는 258번 도로로 갈아타려는데 길이 폐쇄돼 있었다. 멀쩡한 것 같은데 왜?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서서히 고도가 높아지면서 설원이 나타났다. 제설차가 양 옆으로 밀어붙인 도로의 설벽은 봄인데도 높이가 족히 2, 3m는 됐다. 요스테달스브렌 국립공원이었다. 500㎢에 가까운 드넓은 고원이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달의 표면에 눈이 내린다면 이곳 같지 않을까… 그곳을 벗어나 롬이라는 마을에서 55번 도로를 타고 남서쪽으로 꺾으면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악도로인 송네피엘레가 나타난다. 요툰헤이넴 국립공원, 60곳의 빙하 사이로 뻗은 길이다. 노르웨이 최고봉인 갈회피겐(2,469m)을 비롯해 2,000m 이상의 봉우리만 275개가 길을 감싸고 있다. 그 장엄함을 표현할 어휘가, 노령기의 구릉지에서 진화한 네 사람의 모국어에는 없었다.

“다 컸네, 다 컸어.”

한참 만에야 입에서 나온, 극동에서 온 중년 남자들의 부러움 섞인 감상평은 겨우 그거였다. 까마득한 설원에서 수영복만 입고 노르딕 스키를 즐기는 젊은이들을 향한 말이었다. 투명한 젊음이 눈부신 순백의 고원에서 통통 튀어 오르고 있었다. 해발 1,400m의 설원, 그곳에 비치체어를 펴 놓고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반대편 능선에선 야생 순록의 무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대륙도 산도 계곡도 사람도 이곳에선 모두 젊었다. 그래서 아름다웠다. 생각해보니 그때쯤 네 사람의 말투에선, 느끼한 욕지거리는 이미 떨어져 나가고 위악스러운 장난기만 남아 있었다. 본전을 뽑아보겠다는 듯이 온갖 스트레스를 입으로 뱉어내던 대한민국의 중년 남자들의 오기가 어쩌다 사라져 버렸을까. 아마도 그건 하늘과 맞닿은 곳, 순백의 광활함에서 비롯된 표백작용이었을 것이다.

여행은 무탈히 끝이 났다. 차를 반납하고 돌아서는 P, S, L, Y의 얼굴은 매머드라도 한 마리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신석기인들의 그것과 비슷해 보였을 것이다. 볕과 바람에 그을린 기분 좋은 피로를 머금은 나른함. 노르웨이의 대자연 구석구석엔 아직 그런 기쁨을 주는 원초의 세계가 남아 있었다.

영화 '겨울왕국'의 배경이란 사실이 알려져 한층 유명해진 베르겐은 피오르의 수도로 불리는 항구도시다. 북구의 노을엔 푸른색이 많이 섞여 있다.
영화 '겨울왕국'의 배경이란 사실이 알려져 한층 유명해진 베르겐은 피오르의 수도로 불리는 항구도시다. 북구의 노을엔 푸른색이 많이 섞여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도심 뷔르겐의 모습.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도심 뷔르겐의 모습.
도시는 관광객으로 늘 붐빈다.
도시는 관광객으로 늘 붐빈다.
외곽에 노르웨이 국민음악가 그뤼그가 살았던 집이 있다.
외곽에 노르웨이 국민음악가 그뤼그가 살았던 집이 있다.

베르겐ㆍ스트륀ㆍ롬(노르웨이)=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여행수첩]

●노르웨이로 가는 직항은 없다. 네덜란드 KLM항공이 인천을 출발, 암스테르담을 경유해 노르웨이로 가는 항공편을 매일 운항한다. 한진관광이 6월 14일부터 7월 9일까지 매주 토요일(총 5차례) 오슬로까지 가는 직항 전세기 상품을 내놨다. 7박 9일 상품으로 스웨덴과 핀란드 등도 돌아볼 수 있다. 1566-1155 ●렌터카는 일찍 예약할수록 가격이 내려간다. 소형차 기준 완전면책조건 하루 12~15만원 선. 국제운전면허증 필요. 휘발유는 리터 당 2,700원, 경유는 2,500원 정도 한다. 물가에 비해 피오르를 건너는 페리의 삯은 의외로 싸다. ●베르겐 항구 어시장 부근에 새 관광안내센터가 문을 열었다. 베르겐 부근뿐 아니라 피오르 지역 전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www.fjordtours.com 주한 노르웨이관광청 (02)777-5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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