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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이 무엇인가' 알고 싶다면 이 사람을 보라

입력
2014.05.19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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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운동가 김병곤의 아내 박문숙씨
전업운동가 김병곤의 아내 박문숙씨

사형 구형에 "영광입니다"라던 남자 야학서 만나 옥바라지·생계 떠맡아, 남편 24년 전 암으로 떠났지만 "불행하다 생각한 적 없었다"

생협·민가협 등 든든한 맏언니로 힘든 내색없이 온갖일 묵묵히… '4월혁명총집' 탈진 직접 출간도

숨지기 하루 전 "암 투병 중" 갑작스런 부고에 지인들 망연자실, 볕도 안 드는 남편 묘 늘 아파하다 모란공원 양지바른 자리에 합장돼

지금 거짓말 같은 일들을 겪고 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게 무참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좋아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쌍용차 사태에 분통이 터져도 동일방직 똥물사건에 비할 수 없고, 국정원의 행태가 기가 막혀도 70,80년대 그 전신들의 패악에는 댈 게 아니다. 억압의 주체와 방식이 바뀐 것뿐이라고, 국가의 직접 폭력이 자본의 우회적 폭력으로 바뀐 데 불과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건 지금은 휴대폰만 있으면 어디서나 할 수 있는 대통령 욕도, 30년 전에는 목숨 걸 일이었다.

‘정의는 승리한다’는 명쾌한 단문이 생략한 수많은 조건절들, 숱한 이들의 숱한 사연들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여기,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사연이 있다. 민주투사의 아내이자 동료로서, 또 사회활동가로서, 떠나는 순간까지 자신의 삶을 흐트러지지 않게 다잡았던 아름다운 사람 박문숙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장. 지난 4월 2일 그가 별세했다. 향년 59세. 열아홉 대학생 때부터 생의 마지막 날까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헌신하면서 단 한 번 돋보이는 자리에 머문 적 없이 위 아래와 주변을 “어머니처럼 선생님처럼” 챙기고 보살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고인을 “이 땅의 민주주의 발전에 헌신해 온 민주화 운동의 맏언니”라고 기렸다.

고인의 마지막 직함은 녹색환경운동 이사장(2011~13)이었다. 정선순 운영이사는 “한동안 화를 삭이느라 힘들었다”고 말했다. 민청련(민주화청년연합회) 시절부터 20년 가까이 친분을 맺어온 정 이사는 “부고가 전해진 뒤 70통이 넘는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받았어요. 다들 ‘우리가 아는 그 문숙이 맞아’였어요. 믿기지 않았던 겁니다. 저도 그랬어요.” 그의 분노는 아마도 모진 운명에 대한, 이 현실에 대한, 그리고 자신을 비롯해서 고인을 알고 산 모든 이들에 대한 속절없는 원망과 분노였을 것이다. “고인은 자신보다 남편(김병곤씨, 90년 작고), 두 딸보다 동료와 사회를 먼저 챙겼던 분이었어요.” 일감만 많고 보수는 없는 그 직책을 떠안긴 것도, 지난해 언젠가 이런저런 대화 끝에 ‘이제는 쉬고 싶다’는 고인에게 “우리 나이면 한창 뛰어다녀야 할 땐데 벌써 무슨 말씀이냐”고 무지른 것도 정 이사였다. 내색하지 않아 아무도 몰랐지만, 고인은 그 때 이미 암 투병 중이었다. “근년에는 효소에 관심을 보이며 내년부터는 수익사업을 해보자는 얘기도 나눴는데, 돌아가신 뒤 보니 이미 혼자 공부해서 효소를 무려 17가지나 발효시켜 놓으셨더군요. 단체에 주고 간 선물인 셈이죠.” 고인은 예방차원의 환경운동, 특히 친환경 농업과 건강한 먹거리 사업에 열정을 쏟아, 회원들을 인솔해 전국 각지의 친환경 농촌을 다니며 교육하고 직거래 등 도농 상생 방안을 모색했다고 한다.

1955년 1월 19일, 경북 영주의 부잣집 2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난 박씨는 74년 서울여자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한다. 계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는 1학년 때 교내의 가장 선도적 학생운동 조직이던 ‘녹수회’(훗날 ‘타래회’로 개명)에 가입, 농민운동에 뜻을 두고 활동한다. 녹수회는 60년대 후반 서울대 법대 ‘농법회’와 연대해 만들어진 학내 조직으로 충청도 한 마을을 정해 매년 여름과 겨울 농활(농촌활동)을 다니던 전통이 있었다. 녹수회 선배 박성자(공예과 73학번, 슬로푸드문화원 부이사장) 씨가 고인을 처음 만난 것도 74년 농활 때였다. “비밀 서클이어서 학내에서 대놓고 아는 척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죠. 여성스럽고 조용하면서 리더십 강한, 선배 같은 후배였어요.” 박씨가 고인과 각별해진 건 대학을 졸업한 박씨가 노동 현장에서 일하던 70년대 말 무렵부터였다. “제 자취방에 자주 왔어요. 충남에서 영어교사(1978~80)를 하던 땐데 가출한 반 아이들을 찾으러 거의 주말마다 서울에 오곤 했거든요.”

농민운동 인권운동 중심의 사회운동은 70년대 중반부터 노동 현장으로 외연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고인도 대학시절 향린교회에서 야학교사로 일했고, 거기서 남편 김병곤(서울대상대 71학번, 90년 작고)씨를 만난다. 김씨는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화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기소돼 비상보통군법회의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된 뒤 최후진술에서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했다는, 그래서 함께 피고로 섰던 이철 유인태 나병식 여정남 김지하 이현배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머쓱하게 했다는, 바로 그다. “하루는 문숙이가 묻더군요. ‘결혼할까 말까?’ 두 사람이 사귄다는 것도 그 때 알았어요. 전 무조건 하라고 했죠.” 당시 고인은 대학 졸업반이었고, 김씨는 이미 운동권의 명사(名士)였다. 민청학련 재판 일화를 덮어두더라도, 인물로나 인격으로나 전후(前後) 운동가로서의 면모로나 김씨는 참 멋진 남자였다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78년 4월 동일방직 사건 직후 유언비어 날조 및 국가모독 혐의로 다시 구속돼 10.26 직후인 79년 12월 5일 석방된다. 그리고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운동 현장에 복귀, 재야와 대학 학생회의 가교역 등을 맡으며 ‘80년 민주화의 봄’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의 거친 물살에 몸을 싣는다.(김병곤 약전) 두 사람이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셋집을 구해 결혼한 게 80년 3월, 그 즈음이었다. 83년 민청련 출범- 84년 노동자복지협의회 출범- 85년 민통련 출범…, 눈코 뜰새 없던 시절이었다. 결혼과 함께 교사를 그만 둔 박씨 대신, 김씨는 대학 선배가 운영하던 회사에 잠깐 취직하지만 민청련 부위원장과 민통련 정책실 차장을 동시에 맡으면서 금세 사표를 낸다.

고인은 전업 운동가의 아내들이 대개 그랬듯, 번역이나 관공서 우편물 발송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두 딸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를 했고, 그러면서도 어려운 내색 없이 기품을 지켰다고 한다. 누가 어떻게 먹고 사냐고 물으면 그냥 빙긋이 웃곤 했는데, 고인의 그런 태도는 생애 내내 이어졌다. 그 시절 젊은 운동가 부부 다수가 노동자 탁아소가 있던 경기 광명시 철산동에 모여 살았다. 이범영(전 한청련 의장, 94년 작고)씨의 부인 김설이씨, 김희택(전 민청련 의장)씨의 부인 조명자씨 등이 박씨와 친구처럼 지낸 이웃이었다. 박씨가 경기 부천에 액세서리 가게를 열어 잠깐 운영한 것도 그 즈음인 걸로 기억한다. “장사 수완도 있고, 야무져서 밑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 수완이 나중에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자원재활용센터 사무국장(91~93) 시절 ‘아나바다 운동’때 발휘되죠. 훗날 박원순씨가 ‘아름다운 가게’를 시작하면서 박씨에게 도와달라고 한 적도 있어요.”(박성자씨)

고인이 자신의 활동을 본격화한 것은 80년대 중반부터다. 생활협동조합 운동((사)한마당생활협동조합 전무이사, 85~87),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민가협) 창립활동 및 재정위원장(85~89년)이 공식 약력에 나타나 있는 당시 이력이다.

민가협 활동은 남편 옥바라지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민청련 부의장이던 85년 7월 김씨는 또 구속된다. 김근태(2011년 작고) 당시 의장을 비롯한 민청련 간부들에 대한 전면적 탄압의 신호탄이었다. 박씨는 연행ㆍ구속 사태에 넋이 나간 부인들의 손을 이끌고 관할 경찰서며 남영동 옥인동 장안동 대공분실을 돌며 싸우고, 면회하고, 성명서 만들고, 농성했다. 그 일은 대학생과 노동자 부모들로 확대됐고, 자연스럽게 민가협과 유가협(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 91~2010년) 활동으로 이어진다.

“돌이켜보면 웃을 일도 많았다”며 조명자씨가 들려준 일화다. “86년 남편(김희택씨)이 남영동으로 연행됐을 땐데, 그날도 문숙이가 저와 함께 가서는 그 살벌한 대공분실 문을 두드리고 흔들며 바닥에 누워 몸부림을 치다 잠깐 기절을 했던 것 같아요. 요원들이 나와선 병원으로 끌고 갔어요. 이동 중에 의식은 돌아왔지만 문숙이가 계속 기절한 척하라고 하더군요. 전 결국 병원에서 처방한 독한 신경안정제를 맞고 정말 기절을 했어요. 좀 있다 깨자마자 다시 남영동에 가서 난리를 치니까 그 사람들도 기가 막혔던지 문을 열고 면회를 시켜주데요. 대공분실 안에 들어가서 누구를 면회한 건 그게 아마 전무후무한 일일 거예요.”

고인과 동갑내기 친구 김설이씨는 “고인이 있으면 기관원들과 싸움을 해도 참 든든했다”고, “쇠심줄처럼 질겨서 언제나 끝장을 보겠다는 식이었다”고 말했다. “그런 데서 싸울 땐 으레 안 될 걸 알면서도 ‘불법 연행자 석방하라’라고 외치잖아요. 하지만 고인은 정말 석방될 때까지 외칠 것처럼 외치곤 했어요”라고 말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팔다리가 굳고 하혈까지 하던 남편 김씨는 87년 7월 2년 만기 출소하지만, 반 년도 안 지난 그 해 12월, 대통령선거 구로구 부정투표 의혹으로 촉발된 구로구청 점거농성 현장 상황실장을 맡아 다시 구속된다. 감옥에서 위암 발병 사실이 밝혀져 형 집행 정지로 6개월 만에 나온 김씨는 2년여 투병 끝에 90년 말 숨진다. 김씨의 삶을 기록한 김병곤 약전(현무환 편저, 푸른나무 발행)은 김씨의 공적 활동과 당시 정세에 초점을 맞춰 사적인 이야기나 아내 박씨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임종을 다룬 마지막 장 끄트머리에 짤막하게 실려있다.

“암이 유발할 수 있는 온갖 합병증이 그의 몸을 덮쳐 와도 한 순간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 그 투지와 의지가 놀랍기만 했다. 그보다 더 경이적인 것은 아내 박문숙의 의연함이었다. 의사들이 버려둔 남편의 병을 아내는 의사보다 더 정확하고 세심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보살폈다. (…) 문병 온 친지들이 병실 문 밖으로 나가 몰래 눈물을 훔칠 때에도 박문숙은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232쪽)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말이 유행하던 문민정부 시절, 박씨는 농민운동 비례대표로 경기도의원(95~98년)을 지낸다. 농업기반공사 사외이사(2001~03년)를 한 적도 있다. DJ정부가 국가와 공공기관 모든 위원회에 ‘여성 30% 의무 할당’ 토록 했을 때다. 마침 농림부 여성정책담당관(98~2004)으로 일하던 박성자씨가 한국여성농민연구소 부이사장(99~2003)이던 고인을 천거했다고 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장(2009~11년) 시절 고인이 해낸 일이 총 8권의 방대한 월혁명 사료 총집 발간이다. ‘4월 혁명’이라는 용어를 둘러싼 각계의 이견과 반발을 수렴하고 조율하는 데서부터, 좌우 보수 진보 진영의 균형을 유지하며 발간위원회 편집위원회를 구성하고 섭외하고 설득하는 일 등 가장 예민하고 속 썩는 일이 고인의 몫이었다고 한다. 편집위원회 간사였던 현종철(50) 현 사료관장은 “제가 당시 관장이었다면 결코 해내지 못했을 일”이라고 말했다. “50년 동안 사실상 방치해왔던 자료예요. 5년 걸려도 빠듯한 그 일을 1년 준비기간 포함해 3년 만에 해냈어요. 다들 밤샘을 밥 먹듯이 해가며 일에 매달려서 막판에는 다들 탈진 상태였는데, 낼 모레가 출판기념회였어요. 뭘 어떻게 준비할지 막막했던 때 고인이 계획서를 만들어 주셨어요. 그 많은 원탁 테이블마다 초청자 한 사람 한 사람 좌석 배치표까지 그려 두셨더군요. 사료관장이 할 일이 아니죠. 그날 밤에 울컥해서 관장님께 감사 메일을 썼어요. 존경한다고요.”

고인은 어느 자리에서건, 그 무엇으로건 생색이란 걸 낸 적 없었고,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자신이 감당한 어려움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정선순 이사는 “경제적으로도 어려우셨겠지만 늘 밥값을 당신이 내려고 했어요. 누구에게 농담으로라도 ‘밥 좀 사’라고 말하는 걸 못 봤어요.”라고 말했다. 김설이씨는 “아마 그래서, 주위에 걱정 끼치기 싫어서, 투병 사실조차 끝까지 숨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2006년 발병했던 암이 12년 재발하자 항암치료를 받았고 지난 해 2월 수술 직후 입원했다. 고인은 숨지기 하루 전에야 지인들에게 투병 사실을 알렸고, 친정에조차 일주일 전에 연락했다고 한다. 입원 직전까지 박씨는 그 많은 민청학련, 민청련 관련자 재심청구 업무를 모아 정리하고 대응하는 데 매달렸다.

지난 해 12월 남편의 기일, 고인의 어깨와 팔은 보호대로 묶여 있었고, 그 몸으로 말년의 거처로 세 얻어둔 포천까지 가서 제사 음식을 장만해왔다. 그날도 고인은 지인들에게 “오십견인지 어깨가 좀 아프다”고만 말했고, 정 이사에게는 “두 달만 쉬겠다”고, “2월 말 (녹색환경운동) 총회 때 보자”고 말했다. 시누이 김점란씨는 “숨지기 전날 문병 때 ‘오빠에게 시집와서 고생 많았다’고 했더니 겨우 들리는 목소리로 ‘오빠가 욕심 없이 살아줘서 고맙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었다’고 하더군요”라 말했다.

2012년 1월 고 김근태씨의 장지를 고르러 경기 마석 모란공원을 찾던 날, 고인은 응달의 남편의 묘 앞을 오래 떠나지 못했다. 햇볕이 안 들고 습해 이끼가 끼고 떼도 못 자라는 자리였다고 한다. “20년 넘게 늘 마음 아파했어요. 제 일 제쳐두고 남 뒤치다꺼리 그렇게 해줬지만 제 남편 묘는 못 챙긴 거죠. 주위에서 아무도 안 챙겨줬던 거죠.”(박성자씨)

장례위원회는 4일 양가 유족의 동의를 얻어 모란공원의 양지바른 자리에 부부를 합장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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