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도랑물 같이 좁은 압록강 물을 신발 신은 채로 텀벙텀벙 바짓가랭이 함뿍 적시며 훌쩍 한번 건너가봐도 좋으련만…(후략)”
압록강 하류에는 사타구니(跨ㆍ과)를 한번 크게 벌려 폴짝 뛰면 북한과 중국을 넘나드는 지점이 있다. 지난 2006년 원로 극작가 노경식(75)씨는 중국이 ‘압록강 국가중점 풍경구’라며 한국인 관광객들을 불러들이는 데 열을 올리는 바로 그 곳, 중국 랴오닝성 단둥시 호산장성(虎山長成)의 경구(景區ㆍ관광지)인 이뿌콰(一步跨)에 들를 기회가 있었다. 당시 노씨는 중국 사람들의 영악한 장삿속을 새삼 느끼며, 흉중에 솟아 오르는 서글픔을 지그시 억눌러야 했다고 한다. 지난해 3월에 낸 산문집 제목을 아예 압록강 이뿌콰를 아십니까(동행)로 했던 것은 그래서다.
책은 희곡집(전 7권), 역사소설 등을 통해 익히 알려진 노씨의 문재(文才)가 살갑게 다가오는 계기이기도 했다. 40여 편의 장막 희곡에 축적된 세월의 관성도 있겠지만 여전히 그는 건재하다. 연극 배우인 아들 석채(43)씨와 함께 있으니 시쳇말로 존재감은 배가된다. 현역으로서 아직 서슬 퍼렇다.
“지금은 4ㆍ19 혁명을 소재로 한 작품을 준비 중이에요. 경희대(당시는 신흥대) 3학년 학생으로 동대문까지 스크럼 짜고 동참했던 기억을 살려보려는데….” 1960년에 4ㆍ19, 이듬해가 5ㆍ16이었다. 1년 만에 세상이 뒤집혀 “군사 정권의 암흑기”로 바뀌는 요지경 같은 세월을 잘도 버텨냈던 시기다. 그런데 4ㆍ19 정신을 규명하는 연극이 없다니…. 그는 오랫동안 생각해 온 것이라 했다. “배경이요? 소재가 학생보다는 민초예요.”
때마침 이촌향도(離村向都)의 바람이 휩쓸던 시대, 누구든 거지처럼 살았고, 경무대 앞에서는 시위대가 총맞아 죽어 가던 시절이었다. 내년 봄에나 탈고할 요량인 신작에 대해 말하며 노(老)작가는 “역사의 흐름 속, 민초의 삶을 주제로 했다는 점에서 기존작의 연장선”이라고 말했다. 현재와는 무관하게, 밀린 숙제를 하는 심정으로 완결된 희곡으로 쓰고 싶은 마음이다. 중견 연출가 임진택씨의 최근작 ‘상처꽃’이 현대사의 비극을 다룬다는 점에서, 굴절된 시간을 자신의 미학적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땀이 후배들을 분발하게 한다.
“나는 당연히 4ㆍ19와 아무 연관 없지만, 아버지의 영향으로 전부터 역사에 관심 두고 있었다.” 석채 씨는 아버지의 또 다른 면모를 한참 우회해서 알게 됐다. 자신으로서는 그 존재조차 희미했던 아버지의 ‘달집’(1971년작)이 1960년대의 작품 ‘산불’ 등과 함께 레퍼토리화 대상 작품으로 적극 고려되고 있었던 것이다.
국립극단 배우로 활동하던 시기였다. 예술 감독이 바뀌는 바람에 유야무야되고 말았지만, 이후 그는 “배우로서, 그 작품을 꼭 해보고 싶다”는 바램을 갖게 됐다. 전투 중 시력을 잃어 상이용사가 됐지만 핏줄을 이어 가야 하는 손자 윈식 역은 매력적인 배역이었다. “장애인의 좌절과 희망, 삶에의 의지를 제대로 그려 내고픈 마음이다.” 비록 삶의 시간대는 현격히 차이 나지만 부자는 이래서 하나다.
석채 씨는 지금 프리랜서 배우다. 1998년 5월 해체될 때까지 14년 간 국립극단 단원으로 100여 편에 출연했던 그다. 해체 이후는‘연수 단원’이란 이름의 자격으로 프로그램 참가, 2011년 5월 ‘키친’에서 주방 정육사 막스로 분했던 것이 국립과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자기 일만 아는 고지식한 남자와 사회 간의 문제를 영국의 뿌리 깊은 사회주의적 전통에서 조명한 작품이었다.
그는 “나의 대표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당분간은 국립과의 작업은 없다는 비장한 심정이 있었다”고 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는 배우 역시 불완전 고용 상태의 노동자라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궁핍의 시절이었으나, 가난으로 평등했던 저 문청(文靑) 시대의 낭만을 만끽한 아버지가 행복한 세대였을까.
노경식씨는 신흥대(현재 경희대) 경제학과 58학번으로, 작가 황순원으로부터 2년 간 국어를 배운 인연으로 스승을 주례까지 모셨다. “교과서의 ‘소나기’로 이미 알고 있었던 선생님은 내가 보내준 수필을 보고는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어요.”당시 교내 문화 대상에 뽑힌 희곡은 상연까지 됐고, 가난한 학생에게 1년간 등록금 면제라는 혜택을 주었다.
학보에 10회 연재됐던 전쟁 이야기‘난류망은 흘러야 한다’였다. 당시 시 부문 수상자는 뒷날 한국일보에 입사한 이성부 시인이었다. “내가 1년 선배였는데, 한국일보 재직 시절 종종 만났죠.” 시인과 절친했던 민중예술가 손창섭 등등 해서 문화판과 친교를 트는 계기이기도 했다. “당시는 군대 안 가면 일절 취직 못 한 시절이었어요. 2대 독자였던 나는 규정에 따라 일반 군인의 4분의 1인 6개월만 복무했죠.” 졸업 후 가려 했으나 때마침 터진 5ㆍ16 북새통으로 접어야 했다. 힘든 사회상에 취직은 엄두도 못 내고 2년을 놀았다.
그러다 1963년 남산드라마센터 창립 사실을 신문 광고로 알게 되고, 연극아카데미의 극작과 입학한 것으로 새 삶이 시작됐다. 유치진 이원경 여석기 등 한국 연극 1세대의 기라성들이 스승이었고, 순댓국 안주가 일품이던 명동 뒷골목의 막걸리 집은 또 다른 대학이었다. 드라마센터에서 활동하면서 그는 극작가라는 이름을 슬슬 달게 된다. 유치진, 차범석이 선도하던 사실주의적 연극의 시대였다.
“셰익스피어를 필두로 입센, 체홉, 오닐 등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던 때였어요.” 윤조병, 윤대성, 노경식이라는 사실주의파의 대극에 산대놀이 등 한국적 무대 미학을 천착하던 오태석이 장차 한국 연극의 노둣돌을 자임하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수렴하는 사극 리얼리즘에 연극의 정통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양식에 얽매이지는 않으려 했다.”
그러나 석채씨의 리얼리즘론에서 시간의 흐름을 본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다는 의미에서의 리얼리즘은 이제 없다. 현재는 원하는 대로 해체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에게는 리얼리즘이라 할 만한 작품이 있다. 극단 성좌에서 권오일 연출의 ‘느릅나무 밑의 욕망’에서 맡은 주인공 에벤 역이 그러했다. “권 선생님이 대학로에서 올린 마지막 작품이었는데, 당시 공연 끝나면 꼭 ‘소주 한잔’이셨죠.”사람은 스타일로 기억되는 것일까. 오고 간 언어보다 대선배의 부드러운 대화 스타일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배우의 흠결이 보여도 연습장에서 즉각 말하지 않고 뒤에 아버지처럼 편안하게 말하셨어요. 보통은 (연출가들이)배우들에게 마구 스트레스 주기 일쑤인데….”
그가 요즘 후배들과 느끼는 괴리감은 어떤 걸까. “(세대 차는)당연히 있죠. 제 입문기 때는 선배만 보면 무조건 머리 숙였고 연출은 곧 법이었어요. 요즘은 자기 의사, 고집이 강해요. ‘싸가지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 정도로.” 그가 배울 적만 해도 선배의 말에 뭐라 토를 다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연극 행위조차 자기 개성의 표출로 보는 요즘이다. “사실 나도 입문 시절에는 자아 도취적이었죠. 그러나 지금 후배들은 자신이 최고라는 식이에요.”그런 후배들에게 주는 조언이다. “책 많이 읽고, 사회를 생각하라고 해요.” 서른 다섯을 넘어야 현실이란 것을 알게 된다는 나름의 이론이 그래서 생겼다. 결혼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됐고, 배우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하며 연기의 전환점을 맞은 시기였다.
연극 행위란 그래서 거대한 학교다. 처음 국립극단에 갔을 때 대선배 백성희가 던진 “대학에서 뭘 배웠느냐”는 질문에 제대로 할말을 찾지 못하고 당황했던 기억은 여전히 그를 채근한다. 초심을 확인하고 싶은 걸까, 그는 국립극단 입단 초창기에 자신에게 큰 배역을 주었던 희랍 비극 ‘브리타니쿠스’에 다시 도전하게 되기를 바란다. “처음으로 메인 타이틀로 나선 무대였지만 너무나 큰 아쉬움만 남는다. 당시 원작의 무게에 겁도 났고, 또 거기에 비해 28세의 배우에 불과했던 나는 너무 작았다.” 연극배우의 관건이란 정치적 함의 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게 하는 인간적 숙성의 문제라는 사실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그는 자식이 둘이다. “걔들이 만일 연극 배우가 되겠다고 한자면 나는 무조건 반대할 것이다.” 물론 “최저 생활마저 보장해 주지 못 하는 현재 여건이 개선되지 않는다면”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어느 누가 저 말에 토를 달 것인가. 그는 말했다. “누구든 스타를 꿈꾸고 발을 디디지만 특히 연극 쪽 현실은 너무나 빈약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연극에의 꿈이 숙명론과 묘하게 혼재돼 있음을 본다.“결국 내가 살 곳은 무대 위다. 국립에 있을 때는 사실 연극만으로 생활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은 TV 드라마에 나가지만 연기에의 꿈을 놓지 않고 있다.”그러나 기본도 떼지 못한 초보들을 큰 역으로 쓰는 현실은 너무나 불편하다.
곰곰 듣고 있던 아버지가 “연극에 관한 한 외국도 마찬가지”라며 “(그런 기초 예술은) 국가나 사회가 보호해야 한다”는 말을 건넸다. 그는 이산가족의 비극을 그린 1985년 작 ‘하늘만큼 먼 나라’를 본 어린 아들이 펑펑 울었다는 것을 안다. 2004년에는 불어 희곡집이 나왔고, 고향 남원 하정에는 자신이 기증한 4,000여권의 도서로 만든 도서관 하정당(下井堂)문고가 있다. 그러나 어엿한 후배가 된 아들과 나누는 교감만 할까.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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