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과 관련된 현장 소식들을 참담한 심정으로 살피다가 어느 대목에 눈길이 머물렀다. 경기도 안산의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조문차 방문한 대통령을 향해 숨진 학생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대통령 자식이잖아요. 제 자식이기도 하지만, 내 새끼이기도 하지만, 대통령 자식입니다.” 새된 절규가 아닌, 울음기 섞인 또박또박한 말씨가 듣는 이를 더 비탄에 젖게 했다. 많은 이들에게 이 발언은 정서적 울림을 넘어 내용 면에서도 무능하고 답답한 행정부의 수반을 각성시킬 적확한 호소로 여겨졌을 터이다.
외람되게도, 그 순간 나는 애통한 마음 한편으로 ‘대통령 자식’ 같은 건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성 대통령을 ‘국모’라 칭하는 상투적 비유가 불편했고, 그런 케케묵은 유교식 비유를 굳이 들어야 한다면 대통령은 ‘종복’에 가까운 존재 아닌가 싶었다. 학생 어머니는 대통령의 존귀함이 아니라 그의 책임을 일깨우려 그리 말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저절로 튀어오르는 상념들을 내버려두는 식으로 정부를 향해 소리 없이 절규했던 것 같다.
냉정을 차려 따져보자면 대통령(국가)과 나(국민)의 관계는 위계적일 수 없다. 대통령을 정점으로 한 국가기구의 권능은 막강하며 구성원들로부터 고도의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엄연히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택되고 심판 받는 자리다. 국가란, 근대국가의 철학적 근간을 이루는 사회계약론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연상태를 벗어나서 공동체를 결성한 사람이 목적 달성에 필요한 일체의 권력을 다수파에게 양도한 것”(존 로크)이다. 국민은 자신들이 위임한 권력을 행사할 자를 선택하는 권력을 행사하고, 대통령은 권력을 부여해준 이들에게 권력을 행사한다. 국가와 국민은 안팎 구별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공존하는 동시에 길항하는 관계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세월호 참사는 이 나라에서 국가와 국민 사이의 건전한 권력 순환이 끊어졌다는 방증으로 읽힌다. 국민 안전을 약속하며 권력을 위임받은 정부가 470여명의 목숨이 걸린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토록 무능하고 무책임할 줄 어떤 국민이라고 쉽게 상상했을까. 약속과 신뢰가 깨졌지만 당장 책임을 묻기 위해 필요한 권력은 국민에게 있지도 회수되지도 않은 채 종종 우려스러울 만큼 분노에 찬 비난만 메아리친다. 사실 뫼비우스의 띠는 벌써 끊어진 건지도 모른다. 민주국가의 기반을 흔드는 국가정보원의 불법행위를 잇따라 목도하고도 국민은 그 수장의 건성건성한 사과만 망연히 지켜봐야 했다.
국가 앞에서 더는 무력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국가를 긴장시킬 방도를 찾아야 한다. 공동체를 꾸려보는 것은 어떨까.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대안을 모색하고 당국을 상대로 이를 실현할 조직적 행동에 나설 수 있는 모임들 말이다. 이번 참사와 관련해서는 김종엽 한신대 교수가 제안한 희생자 친지 및 사고 피해자의 자력화를 돕는 ‘재난공동체’, 유사 사고 발생시 효율성 높은 민관 합동 구조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민간잠수부 공동체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현장성과 전문성을 지닌 민간공동체가 관료화되기 쉬운 국가기구를 쉼없이 들깨운다면 민관 협치(協治)라는 진일보한 국가운영 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
공동체가 꼭 국가와의 뫼비우스 띠를 잇는 공무에 헌신할 필요는 없겠다. 나와 무언가를 공유하는 이들과 연대하고 그 속에서 삶이 풍요로워진다면 그걸로도 족할 것이다. 우린 너무 많이 국가만 바라보고 살아온 건 아닐까. 국민이라는 정체성에 지나치게 자신을 함몰시켜온 건 아닐까. 국가를 향한 주체 못할 분노로 소진되고 있는 지금의 감정을 더 나은 자신, 더 행복한 생활세계를 설계하기 위해 조금 아껴뒀으면 한다.
이훈성 국제부 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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