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개막한 전주국제영화제의 화제작 중 하나는 다큐멘터리영화 ‘사무엘 풀러의 삶’이다. (주로) 감독으로, 배우로 뜨겁게 살다간 미국 영화인 사무엘 풀러(1912~1997)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영화다. 신문 판매원으로 밥벌이를 시작해 17세 때 범죄 담당 기자가 됐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보병으로 전장의 피비린내를 맡고 흙먼지를 삼켰던 그는 마흔이 다된 나이에 감독으로 변신했다.
누구 못지않게 죽음을 많이 목격했고, 사회 밑바닥을 훑었던 그는 거친 영상미를 선보이며 할리우드의 이단아가 됐다. 장 뤽 고다르와 빔 벤더스 등 유럽 거장을 열광시켰고 그들의 영화에 영향을 줬다. 그의 예외적인 삶을 돌아본 ‘사무엘 풀러의 삶’은 그의 딸 사만다 풀러에 의해 만들어졌다.
전주에서 만난 사만다는 영화 제작에 얽힌 뒷이야기를 간략히 들려줬다. 그는 아버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사무엘 풀러의 삶’의 제작을 기획했다. 웹사이트를 열어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서 제작비를 모았다. 아버지를 흠모해 자신의 영화에 출연까지 시켰던 벤더스 등 세계 유명 영화인들이 인터뷰로 힘을 더했다.
사만다는 아버지를 영화제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 집은 딱히 휴가라는 게 없었다. 세계의 여러 영화제를 다니며 가족이 함께 한 시간이 휴가였다”고 회고했다. 사만다는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가족 휴가도 사라졌는데 이번 영화로 전주를 비롯한 세계 여러 도시를 다시 여행할 수 있게 됐다”며 웃었다. 영화제 덕분에 사만다는 아버지와 함께 한 과거를 반추하며 삶을 새롭게 꾸밀 수 있게 된 셈이다.
전주영화제의 대표적인 기획 프로그램인 ‘디지털 삼인삼색’에 참가한 헝가리 감독 기요르기 폴피도 전주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예술적인 성향이 진한 그는 ‘자유낙하’라는 영화를 전주영화제의 지원으로 완성해 전주를 찾았다. 그는 “어느 날 10만 달러를 보조해줄 테니 장편영화를 만들 생각이 있냐는 이메일을 전주영화제로부터 받았다”며 “주저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제작비 조달에 매번 애를 먹었던 동구의 예술영화 감독은 영화제의 후원으로 신작을 발표하며 쉽지 않은 이력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올해 전주영화제는 침울하게 시작됐다. 멋진 옷을 휘감은 배우들이 개막식 레드 카펫을 밟지 못했고 흥겨움을 더해줄 야외 무대 행사도 모두 취소했다. 지난달 발생한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기 위해서였다. 영화를 시작할 때마다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을 위로하는 글귀가 국문과 영문으로 스크린에 떠올랐다. 검은 색 바탕에 적힌 이 문구는 매번 눈에 물기가 차게 했다. 그래도 객석은 빈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많은 영화 팬들이 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굴렀다. 영화제가 아니면 보기 힘든 극장 안 모습도 여전했다. 관객들은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면 박수를 보냈고 자리를 떴다. 적어도 전주를 찾은 영화 팬들은 세계의 여러 영화들을 보며 국가적 슬픔을 잠시나마 잊었을 것이다.
전주영화제의 개막작은 ‘신촌 좀비 만화’였다. 류승완 한지승 김태용 감독이 각각 만든 3D단편영화를 하나로 묶은 옴니버스영화다. 세 개의 에피소드 중 김 감독의 ‘피크닉’이 마음을 유난히 잡았다. 자폐기가 있는 동생 때문에 자신의 삶이 방해 받는다고 생각하는 여덟 살 소녀가 동생과 비밀스러운 소풍에 떠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가난 속에서도 자신의 삶이 지닌 보석 같은 가치를 소녀가 깨닫게 되는 모습만으로도 가슴 속에 파도가 쳤다.
어쩌면 영화는, 영화제는 유흥보다 위로와 희망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지 모른다. 세상의 비극이 제아무리 우리를 짓눌러도 영화는 만들어지고 상영되고 우리의 삶도 지속된다. 아니, 그래야 한다.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느낀 단상이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