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헌법을 읽었다. 전문(前文)부터 시작해 총 10장, 130조를 한달음에 내처 읽었다. 시험 대비용 발췌독이 아닌 자발적 통독은 처음이었다. 참척(慘慽)의 유사체험으로 영혼이 압도되어 버린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처럼, 나 또한 그날 이후 하나의 날카롭고도 거대한 질문에 가위 눌린 듯 시달리고 있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이 억울하고도 분한 질문에 대한 답을 꼭 찾아야만 했다.
헌법은 곳곳이 아름다웠다. 제1장 총강 중 제7조 1항.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 제2장 국민의 권리와 의무 중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같은 장 제34조 6항.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새삼 울컥했다. 내가 의무를 다하여 국가를 사랑하였으므로, 국가 또한 나를 사랑하고 지켜주리라는 약속의 언어들. 바다에 자식을 잃고 엄마들은 절규하는데,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였어? 이것밖에 안돼?” 통곡하고 있는데, 이 판타지는 너무 아름다워 차라리 가혹하다.
그동안 수도 없이 여객선을 탔고, 비행기를 탔고, 버스와 지하철을 탔다. 여행지의 콘도와 펜션에서도 수많은 밤을 보냈다. 백화점과 호프집에도 드나들었고, 한강물이 출렁대는 다리 위는 매일 건너 다녔다. 창공을 날면서는 추락하지 않을까, 물을 건널 때면 혹여 빠지는 게 아닐까, 소방차의 사이렌이 울리면 지금 여기에 불이 난 건 아닐까 원초적 공포가 엄습하곤 하지만,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낙관으로 불안을 물리쳐왔다. 침몰할 정도로 위험한 배는 애초에 바다로 나올 수 없고, 폭설이 왔다고 지붕이 무너지는 허술한 건축물은 설계 단계에서 허가를 받을 수 없으며, 재난이 닥친다 해도 침착하게 구조대원의 지시에 따르면 목숨은 건질 수 있으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무능하고 탐욕스런 선장은 어디에나 있고 막을 도리가 없으므로, 우리는 국가를 믿었다. 그렇게 많은 사고를 겪었는데, 국민 생명과 안전 보장이라는 기본적 책무쯤은 감당할 수 있겠지, 오지게 착각했다. 일상은 그렇게 영위됐다.
이 땅에서 죽음이란 한낱 수건 돌리기 게임 같은 것임을 충격적으로 깨달은 지금, 아노미의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이데올로기다. 생존의 기초인 안전은 이미 저마다가 개별적으로 구매해야 할 상품이 되어버렸고, 구매력이 없는 이들은 간단히 절감되어야 할 비용으로 처리된다. 기업이 나의 목숨을 대가로 비용을 절감할 때, 국가는 기업과 한 편이었다. 규제는 암덩어리이므로, 국가는 나를 보호하지 않는다. 사전에도, 사후에도, 나를 보호하지 않는 국가, 그 국가의 아름다운 헌법을 읽는 일은 서럽고도 슬프다.
돌아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고통을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없다. 못 찾아서 기다릴 것이고, 찾았어도 기다릴 것이다. 기다리고 기다렸는데도 돌아오지 않아서, 또 다시 기다리고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끝끝내 그들은 기다릴 것이다. 저 존엄한 실존들의 박탈을 속수무책의 고통 속에서 지켜보는 동안, 국가는 우리에게 더 이상 추상이 아니라 엄연한 실체로 들이닥쳤다. 규제는 없으나 결탁은 있고, 권한은 있으나 책임은 없다. 무능하고 사악한 배신의 주체로, 국가가 이토록 생생하다.
다시 헌법을 읽는다. 청와대는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라는, 라면에 계란을 넣어 먹은 것도 아니잖냐는 저들의 귀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읽는다.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큰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복지국가가 아니어도 좋다. 저녁이 없는 삶이어도 된다. 그저 무고한 생명들이 죽지만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국가는 나를 배신하는데, 나는 국가를 배신할 수가 없다. 배신하지 못하는 자의 비애로 또 다시 울음이 차오른다.
/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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