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봉비평문학상을 처음 수상하신 김현(1942~1990) 선생님의 제자로서 스승의 맥을 잇는다고 생각하면 영광스럽지만, 저보다 훨씬 부지런하게 활동하고 성과도 내는 비평가들에게 차례가 돌아가야 하는데 20여 년 만에 책을 낸 제가 받아서 죄송스럽습니다.”
사적인 것의 거룩함(문학과지성사 발행)으로 제25회 팔봉비평문학상의 영예를 안은 권오룡(62ㆍ한국교원대 불어교육과 교수)씨는 수상에 앞서 후보에 올랐던 다른 비평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사적인 것의 거룩함은 권씨가 1979년 등단해 평론집 존재의 변명(1989)과 애매성의 옹호(1992)를 펴낸 뒤 21년 만에 낸 책으로 1993년부터 2010년까지 17년에 걸쳐 쓴 16편의 평론을 묶었다.
만장일치에 가까운 심사위원단의 호평 속에서 유일하게 지적된 단점이 ‘현장성의 부족’이었다. 그는 오랜 공백 끝에 세 번째 비평집을 낸 것에 대해 “두 번째 비평집을 낸 뒤 19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변화한 상황 속에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성에 대한 신뢰와 이성의 상대화라는 두 가지 엇갈림 속에서 어떤 물결을 타고 노 저어 갈지 정리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사적인 것의 거룩함은 사적인 것의 진정한 가치와 사회적 의미를 신중하게 사유한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문학이 추구해 나가고자 하는 진정성이 아직 남아있다면 그건 사적인 수준에 보존돼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하면서 마르크스의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개념을 끌어왔다. “뤼시앵 골드망은 사용가치가 진정한 가치이고 교환가치는 타락한 가치라고 했죠. 사용가치가 교환가치의 지배를 받는 간접화 현상처럼 20세기 이후 문학에서는 진정한 가치가 점점 교환가치에 의해 가려지고 지배되고 억압되고 있습니다. 사적인 것의 거룩함을 찾아내는 과정은 이를 한 번 더 확인해보는 작업이었습니다.”
권씨의 비평은 주제 비평이나 개념 비평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를 연결해 하나의 줄기로 포획하려는 시도를 이 비평집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다. “그 어느 때보다 다양했고 대담했고 발랄했고 경쾌했다”고 말하는 1990년대 한국문학 속에서 그는 주제나 개념이 아닌 표정을 읽어낸다. 그것은 우울이다. 산과 산을 이어 산맥을 그리듯 한국문학의 맥락을 짚어내는 대신 “바다에 드문드문 떠있는 섬을 보는 기분으로” 파악한 것이다. 책에서 그는 1990년대 한국 문학의 우울을 언급하는 건 “우리가 하나의 역사적 과정으로 체험한 1990년대의 현대성의 일면을 조명하는 작업”이라고 썼다.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며 프랑스식 문학비평에 적잖은 영향을 받았을 터. 하지만 그는 유명 학자들의 이름이나 이론을 자주 끌어들이는 편이 아니다. 철학자가 자신의 철학적 개념을 예증하는 도구로 문학작품을 인용하는 방식이 국내 비평계에 끼친 영향이 크지만, 그는 “특수한 맥락에서 나온 성과이기 때문에 한국 문학에 바로 끌어다 써먹고 활용하는 건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 한국문학의 위기를 말하지만 그는 수긍하지 않는다. 위기에 처한 건 문학이 아니라 삶이라는 생각에서다. “삶이 있는 한 문학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언어 없이 살아가는 삶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막연하게 사람들은 문학이 진실이나 가르침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이 깨진 이후 위기에 처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문학이 가르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죠. 문학이 놓쳐버린 빈 자리를 차지한 게 자기계발서나 ‘힐링’을 말하는 책들입니다. 하지만 문학은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질문을 할 뿐이죠.”
그에 따르면 비평가는 두 가지를 염두에 두면서 글을 써야 한다. 작가라는 한 명의 타자와 독자라는 또 다른 타자다. 두 타자를 함께 충족시키기 위해 “작가에 대해서는 공감의 노력이, 독자에 대해선 설득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현 선생님의 ‘분석과 해석’을 저 나름대로 바꿔본 것”이라는 설명에서 스승에 대한 존경을 읽을 수 있다. 비평집에선 또 한 명의 스승 김우창 문학평론가를 거론하며 “한국문학은 김우창의 비평적 업적을 통해 필연의 움직임으로의 동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라고 썼다.
비평의 역할을 묻자 그는 문학의 역할을 말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세 가지 꼭짓점으로 이뤄진 삼각형 안에서 산다고 생각합니다. 주체와 타자 그리고 세상이죠. 그 중심에 있는 게 언어입니다. 삼각형이 언어를 통해 순환되고 소통되어야 건전한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문학이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아니겠나 생각합니다. 같이 계속 소통할 수 있게 해야죠. 비평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삼각형의 순환이 원활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일조해야겠죠.”
고경석기자 kave@hk.co.kr
약력
▦1952년 경주 출생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동 대학원 문학박사 ▦1979년 문학과지성을 통해 등단 ▦비평집 존재의 변명 애매성의 옹호, 편저 이청준 깊이읽기 김원일 깊이 읽기, 번역서 영혼의 시선(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메인스트림(프레데릭 마르텔), 소설의 기술(밀란 쿤데라) 등 ▦대한민국문학상, 소천비평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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