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들이 만발하고 있다. 목련과 개나리, 벚꽃과 진달래에 이어 튤립도 한창이다. 그런데 꽃들이 지는 것은 운명이어서 오래지 않아 꽃잎을 바닥으로 떨구기 시작한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은 아쉽고 허전하기만 하다. 꽃을 사시사철 완상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결국 조화라는 걸 만들게 했을 거다. 어떤 조화는 실상 향기만 없을 뿐이지 진짜 꽃보다 더 진짜 같다.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조화의 꽃잎에 손을 대보고 조화라는 걸 알고는 멋쩍은 웃음까지 짓는 경우를 여러 번 본다. 하긴 조화의 경쟁력은 얼마나 진짜 꽃과 비슷하냐에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진짜 꽃과 최대한 비슷한 조화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가짜인 것은 선택되지 못한다. 그것은 사람의 사회도 마찬가지여서 얼치기일수록 더욱 더 프로의 흉내를 내려는 것 같다. 자신의 능력을 사실과 다르게 포장하는 것이다. 문화 예술 정치 경제 할 것 없이 우리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다 그런 것 같다. 이를테면 얼치기 시인이 가장 전형적인 시인의 포즈를 가지고 있고, 얼치기 정치가가 국민을 걱정하는 포즈를 가장 그럴듯하게 취하고, 얼치기 스님이 염불을 가장 구성지게 외는 것이다. 아마 자기 자신의 눈에도 자신의 부족함이 보이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그걸 더욱 철저하게 위장하는 거다. 그런 위장에 속는 사람도 있고 속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야 하는 게 삶이라면, 그건 참으로 눈물겨운 인간의 비애다.
김도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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