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건 대낮에 푸른 댓잎 같은 생명들이 우리의 눈앞에서 물속에 잠겨 들었다. 물속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아이들은 어른들을 믿었다. 그 어른들이 바로 우리라는 것이 이제는 벌써 황당한 일조차 아니다. 그 참상에 가슴을 때리며 저 자신이 거대한 악 속에 침몰해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어른들이 이제 무슨 말을 한들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비통함이 잊힐 것이 두렵고, 또다시 번들거리는 얼굴로 웃게 될 것이 두렵다. 죄악의 구렁텅이에 더 깊이 잠겨들며 죄악이 죄악인 줄도 모르고 마음이 무디어 질 것이 두렵다.
우리는 또다시 아이들을 줄 세우고, 결국 따지고 보면 너는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뜻으로 요약될 말로 훈계를 할 것이다. 우리는 또다시 ‘예능’을 찾아 채널을 돌리며 우리가 잘 살고 있다고 흐뭇해할 것이다. 천년 숲이 불도저에 형체도 없이 무너져도 다른 숲이 아직 많다고 말할 것이며, 개펄에 둑을 쌓아 생명의 땅을 사막으로 만들고도 지도를 바꾸었다고 자랑할 것이다. 저 높은 크레인 위에서 한 인간이 목에서 피가 넘어오도록 소리 질러도 우리는 땅만 내려다보고 걸을 것이며, ‘희망퇴직’을 당하고 목매단 사람이 내 가족도 내 친척도 아닌 것을 우선 확인할 것이다. 제 삶의 터전을 지키려던 사람들이 불에 타 숨졌을 때도, 불타지 않은 사람들이 붙들려가 중형을 선고받았을 때도 우리는 그 사람들이 내가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기지 않았던가. 서해페리호가 넘어진 것이 그제 일이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것이 어제 일이다. 우리는 또다시 시대의 악을 세상의 풍속으로 여길 것이고, 거기서 오는 불행을 운 없는 사람들의 횡액으로만 치부할 것이며, 참화는 또다시 일어날 것이다.
무슨 말이 이 무서운 망각에서 우리를 지켜줄까. “그 동안 가난했으나 행복한 가정이었는데, 널 보내니 가난만 남았구나.” 단원고의 한 학부모가 이런 말을 써서 팽목항에 내걸었다. 이 짧은 말의 밑바닥에 깔려 있을 절망감의 무한함까지 시간의 홍진 속에 가려지고 말 것이 두렵다. 우리는 전란을 만난 것도 아니고 자연재해에 휩쓸린 것도 아니다. 싸워야 할 적도, 원망해야 할 존재도 오직 우리 안에 있다. 적은 호두 껍데기보다 더 단단해진 우리의 마음속에 있으며, 제 비겁함에 낯을 붉히고도 돌아서서 웃는 우리의 나쁜 기억력 속에 있다. 칼보다 말이 더 힘 센 것은 적이 내부에 있을 때가 아닌가. 죽은 혼의 가슴에 스밀 말을, 짧으나마 석삼년이라도 견딜 말을 어디서 길러 올리고,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