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설탕 한 스푼을 만들기 위해 대만 타이난 외곽의 사탕수수 농장에 왔다.”
화면을 가득 메운 사탕수수 밭에 한 남자가 소리 없이 들어선다. 낫을 손에 쥔 그는 한 눈에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손길로 나무를 베어내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이어지는 장면은 사탕수수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작게 토막 내 돌로 빻는 모습. 자막은 대만의 근현대사에서 설탕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설명한다.
“일본은 식민지 경제정책으로 지배국의 산업을 발달시켜 엄청난 세수를 벌어들였다. 일본이 전쟁에 패하면서 식민지 국가에 세운 모든 산업 기반들은 고스란히 해방된 국가의 산업이 되었다. 이후 대만은 설탕 수출로 외화를 벌어들였고 대만의 고도 경제성장을 가능케 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설탕은 대만을 동아시아의 역사와 이어주는 매우 중요한 지표인 셈이다.”
한 달 간의 노동 끝에 엄지 손가락 한 마디 분량의 설탕을 생산하면서 영상은 끝이 난다. 이완 작가의 3채널 비디오 작품 ‘메이드 인 대만’이다. 지금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아트스펙트럼 2014’에 출품된 이 영상의 주인공은 작가 자신이다. 어느 날 아침 마신 당근 주스가 중국산 당근과 대만산 정백당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안 그는 직접 대만으로 날아가 설탕을 만들기로 한다. “나는 내게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것들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전 처음 보는 사탕수수를 베어 설탕을 만드는 지난한 과정 속에서 작가는 지난 100년 간 대만이 겪은 정치?경제?사회의 변화를 온 몸으로 체험한다.
미련스럽다 못해 기이해 보이는 설탕 생산 공정은 생산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린 현 세대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손가락 하나만 까닥이면 모든 물건이 집까지 배달되는 마법 같은 현실이 언제부터 우리의 일상이 됐을까. 미국산 소맥분을 중국에 있는 공장에서 말레이시아산 식용유로 튀겨 만든 과자를 동네 편의점에서 사 먹을 수 있는 환경은 우리의 내면을 어떻게 바꾸고 있을까. 대만의 근현대사를 한 줌의 설탕으로 증류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목구멍으로 넘어간 설탕과 친밀해지는 데 성공하는 작가의 모습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희미한 향수를 불러 일으킨다.
올해로 5회째 열리는 아트스펙트럼 전에는 이완 작가를 비롯해 김민애, 박보나, 송호준, 심래정, 이은실, 장현준, 정희승, 제니 조, 천영미 등 젊은 작가 10명이 참가해 31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아트스펙트럼을 통해 격년으로 유망 작가들을 선정해온 리움미술관은 올해부터 심사위원에 외부 인사들을 참여시키고 수상제를 도입하면서 변화를 꾀했다. 구경화 책임학예연구원은 “외부 심사위원이 평가에 참여하면서 퍼포먼스, 과학 프로젝트 등으로 작품의 폭이 넓어졌다”고 평가했다.
선정된 작가 중 송호준씨는 지난해 세계 최초로 개인 인공위성을 쏘아 올려 화제가 된 인물이다. 국가의 도움 없이 순전히 인터넷에서 찾은 지식만으로 인공위성을 쏘는 데 성공한 그는 ‘인공위성 퀴즈쇼: 통신모듈 편’이라는 작품을 통해 인공위성 발사에 필요한 지식을 대중과 공유하고자 한다. 그는 강연영상과 텍스트를 통해 인공위성 제작의 핵심인 통신모듈 만드는 법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시험 문제까지 낸다. 지식을 ‘유포’하려는 작가의 집요한 태도에서는, 정치적?군사적 목적에 의해 통제되는 첨단기술을 개인의 영역으로 끌어오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작가는 퀴즈쇼에 상품도 걸었다. 1등 상품은 인공위성 발사를 축하하기 위해 한 잡지사와 패턴 디자이너가 협업해 만들어준 멋진 재킷이다.
이밖에 전통 동양화의 기법으로 성과 욕망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이은실의 ‘선을 넘는다, 얼마든지 넘을 수 없다’와 손으로 그린 그림을 스캔해 어둡고 음습한 애니메이션을 만든 심래정의 ‘밤하늘을 나는 새: 밤의 행진’도 눈에 띈다. 전시는 6월 29일까지 열린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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