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tvN ‘응답하라 1994’는 TV 화면 가득한 1990년대 소품들이 더욱 깊은 여운을 주었다. 호출기(삐삐)와 시티폰, PC통신용 단말기 등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 20년 전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영화 ‘접속’ ‘미술관 옆 동물원’ ‘몽정기’ ‘여자 정혜’ 등에서 미술과 소품을 담당했던 서명혜 미술감독이 디테일을 잘 살렸다. 서 감독은 “1990년대를 대표하는 물품을 구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 안 다녀 본 곳이 없다”며 “단종된 제품은 직접 제작해서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였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디테일이 드라마를 성공의 반열에 올린 것이다.
가정이 있는 남녀의 금지된 사랑을 그린 영화 ‘인간중독’ 역시 디테일이 살아있는 작품이다. 1969년 베트남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때 군 관사 안에서 벌어지는 육군 대령 김진평(송승헌)과 부하의 아내 종가흔(임지연)의 파격적인 사랑이 당시의 살구 빛 색채를 더하며 묘한 영상을 만들어낸다. 앞 길이 탄탄대로인 김진평이 종가흔에게 왜 빠졌는지, 그녀에게 어떤 치명적인 매력이 있는지 등을 영화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아 답답함이 느껴지지만 1960~70년대 복고풍 인테리어와 라이프스타일, 패션 등 시각적인 재미가 그런 답답함과 어색함을 상쇄한다. 군 관사 단지의 주택과 미장원, 음악감상실, 병원 등은 당시의 멋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음악감상실 안에서 퍼지는 레코드와 흑백 텔레비전, 미장원에서 여자들이 앉은 의자, 찻잔, 그릇, 성냥갑 등이 영화의 한 요소로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인간중독’에 이렇듯 생명을 불어넣은 주인공은 김지수 미술감독이다. 그는 영화 ‘늑대소년’ ‘즐거운 인생’ ‘주홍글씨’ 등에서 주인공들의 소박한 일상을 그리는데 큰 힘을 보탰다. 실제로 김지수 미술감독은, 군인 출신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을 관사에서 보낸 김대우 감독의 구체적인 생활상을 듣고 당시의 멋스러움을 살릴 수 있는 소품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헤맸다. 김지수 감독은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을 돌며 ‘인간중독’에 필요한 물건을 구했고 심지어 미국, 유럽 등 외국으로도 건너갔다. ‘인간중독’의 한 관계자는 “미술팀이 40개가 넘는 전국의 촬영지를 찾아 군 관사 내의 다양한 공간들을 재현해 냈고 없는 소품은 직접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미술팀은 또 과감한 도트무늬 또는 꽃무늬 원피스와 헤어밴드,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큰 벨트 등으로 그 시절 관사 내 여인들의 스타일을 살려 극의 재미를 더했다. 영화 ‘모던보이’로 1930년대 라이프스타일을 제대로 부활시켰던 곽정애 의상감독 역시 ‘인간중독’의 숨은 조력자다.
안방극장에도 예전의 향수를 떠오르게 하는 드라마가 있다. KBS 아침극 ‘순금의 땅’은 시대를 반영하는 상황과 대사가 눈길을 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0년대와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순금의 땅’에 순금(강예슬)의 출생의 비밀과 우창(강은탁)의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중심으로 살인과 납치, 폭행 등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전체적으로 ‘막장코드’에 가깝지만 그 속에서 소소한 재미가 느껴지는 것은 당시의 모습을 담은 장면과 대사 때문이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장면에서는 아이들이 허허벌판에 지은 천막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이 나온다. 깡통을 그릇 삼아 ‘꿀꿀이 죽’을 떠 먹는 아이, 미군이 들락거린 기지촌, 동네에 꼭 있던 망태꾼, 잡동사니를 팔던 점방, 전국을 돌아다니는 보따리 약장수 등이 소박한 우리네 삶을 보여준다.
1970년대 서울의 모습도 흥미롭게 담아냈다. 이제는 가정집에서 사용하지 않는 백열전구는 당시의 여관에선 귀한 존재였다. 전기요금을 아끼려고 방과 방 사이의 벽을 뚫어 천정에 달고 두 방을 한꺼번에 비추었다. 1970년대 어둑어둑하기만 했던 방이 그대로 재현됐다. 극중 점방 주인이 “10원이나 하는 비싼 라면을 아무나 끓여주면 어떡해!”라며 아들을 구박하는 장면이나 아들 덕구가 “월남전에 가려고 박 사장에게 추천서를 써달라고 했어”라고 하는 대사가 중장년층의 공감을 부르는데 한 몫하고 있다.
강은영기자 kis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