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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남겨진 이들의 고통스러운 내면을 찬찬히 응시하다

입력
2014.05.1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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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신작 소설 <소년이 온다>
한강 신작 소설 <소년이 온다>

1980년 5월, 중학교 3학년인 ‘너’ 동호는 친구 정대와 시위대 속에 있었다. 친구가 계엄군이 퍼부은 총알비에 맞아 쓰러졌지만 뛰어가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나 자신까지도.” 열여섯 살인 ‘나’ 정대는 열십자(十)로 포개진 시체들 속에서 썩어가면서 혀도 목소리도 없이 신음한다.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동호와 함께 상무관에서 죽은 몸과 영혼을 위로하던 ‘그녀’ 김은숙은 그로부터 5년이 지나 서대문경찰서에 끌려가 ‘일곱 대의 뺨’을 맞는다. 출판사에서 편집을 담당한 희곡 원고 때문이다. 곡절 끝에 무대 위에 올려진 연극에서 한 인물이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인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10년 전 대학생 김진수와 함께 연행돼 끔찍한 고문을 당했던 ‘저’는 옛 동료의 자살과 관련해 진술을 요구 받는다. ‘저’는 묻는다. “무슨 권리로 그걸 나에게 요구합니까.”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광주에서 시민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잔인한 고문을 당한 ‘당신’ 임선주는 20여년이 흐른 뒤 봉제공장에서 일할 때 노조활동을 함께했던 성희 언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찾아간다. 30여년 전 막둥이를 허망하게 잃은 어머니 ‘나’는 텅 빈 집에서 하얀 습자지에 싸놓은 학생증 사진을 보며 가만가만 부른다. “……동호야.”

작가 한강(43)의 여섯 번째 장편 소설 소년이 온다(창비 발행)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가슴 한 켠이 베인 듯 아리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군사정권의 폭력에 맞서 싸우다 쓰러진 중학생 동호와 주변 인물들, 그 후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스런 내면을 천천히 응시하는 이 소설은 34년 전의 ‘5월’ 뿐만 아니라 34년간 이어진 ‘5월’을 이야기한다. 사건의 외적인 증언보다 인물의 내밀한 상처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한강
한강

올해로 등단 20년을 맞는 작가는 15일 만난 자리에서 “몇 년 전만 해도 광주 얘기는 평생 쓰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제가 20, 30대 때만 해도 광주 얘기가 충분히 재현됐다는 판단에 저까지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하고 싶어졌어요. 최근 몇 년간은 광주가 얼굴을 바꿔서 다시 찾아오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게 외적인 이유라면 내적인 이유는 광주의 5월이 인간의 참혹한 내면을 참혹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걸 뚫고 나가지 않는다면 인간의 존엄과 고귀함에 다다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20년간 소설을 쓰면서 ‘인간이란 어떤 존재고 폭력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파고들었던 작가는 어린 시절의 간접 경험으로 돌아갔다. 광주 출신인 그는 계엄군이 들이닥치기 몇 달 전 소설가인 아버지 한승원을 비롯해 가족과 함께 서울 수유리로 이사했다. 광주의 비극은 추석 날 모인 친척들의 대화에서 알게 됐다. 동호의 이름도 그때 들었다.

평소에도 취재를 게을리 하지 않는 편이지만 소년이 온다를 준비하며 작가는 3개월간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광주와 관련한 책과 사진, 동영상을 꼼꼼히 챙겨 봤다. “재현하고 기록하고 증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다른 작가들이 이미 했던 걸 반복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 다른 목소리로 써보자는 생각을 했다”며 “기존 작품들이 열흘간의 항쟁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수십 년간 피폭처럼 이어지는 트라우마에 대해 다루려 했다”고 말했다.

소설은 6개의 장을 통해 6명의 목소리가 1인칭, 2인칭, 3인칭 등 다양한 시점으로 과거와 현재에 대해 이야기한다. 독자들은 이렇게 6명의 목소리를 통해 1980년부터 2013년까지 33년의 시간을 뚜벅뚜벅 건너간다. 실존 인물과 실재 있었던 일을 토대로 썼지만 모든 것이 1대1로 대응하는 다큐멘터리인 건 아니다. 작가는 “사실과 허구의 비율이 85대 15쯤 될 것”이라고 했다.

광주에 대해 쓰는 건 작가에게도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자료만 읽고 살던 땐 악몽에 시달린 적도 많았다고 그는 에필로그에 적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는 현실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어요. 매일 벌 받는 느낌이 들었죠. 그렇지만 기왕 할 거면 잘하자는 동기가 강했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잘하자는 주문을 걸기도 했죠. 지난 주에 제본된 책을 받았는데 유난히 가슴이 뜨겁더군요. 처음 낸 책도 아닌데,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또 다시 5월이다. 햇살이 벌써 뜨거운데 웬일인지 뼛속까지 찌릿찌릿 시리다. 이미 치렀어야 할 수많은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우리의 삶이 장례식이 된 건 아닐까. 무고한 영혼들을 충분히 보듬어 주고 떠나 보냈는지, 앞으로도 잊지 않고 이름을 부르며 손 잡아 줄 수 있을지 우리는 확신하지 못한다. 1980년 봄이나 2014년 봄이나, 국민의 무고한 죽음 위에 군림하는 나라에 산다는 건 끝나지 않은 장례식장에 앉아 있는 것 같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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