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휴스턴 감독의 대표작 ‘아스팔트 정글’(1950)은 현대사회의 비정함을 그린다. 금고털이에 나선 일당이 서로 속이고 속다 결국엔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는 과정을 그린 범죄물이다. 아스팔트라는 현대문명 위에 뿌리내린 자본주의라는 정글을 영화는 비판적 시선으로 전한다. 등장인물 대부분은 사회적 용도를 잃은 전과자들인데 영화를 보다 보면 그들에게 마음이 쓰인다. 한탕의 목적이 애절해서다. 아픈 아이를 보살피거나 오래 전 떠나온 고향집을 찾고 싶은 소박한 소망이 그들에게 범죄를 부추긴다. 필름 누아르 영화들이 그렇듯 우발적인 선택이 촉발한 불행으로 인물들은 몰락한다.
상영 중인 영화 ‘표적’(감독 창감독)은 악랄한 형사 송 반장(유준상)과 그에 맞서는 특수부대원 출신 여훈(류승룡)이 이야기를 이끈다. 선한 얼굴의 송 반장은 등장하자마자 웃음을 안긴다. 수첩에 엉뚱하게 그려낸 사건 설명도가 그의 허술한 면면을 암시한다. 하지만 관객들은 곧 깨닫는다. 송 반장이 허허실실 전법으로 상대의 경계를 무력화한 뒤 자신의 각본대로 갖은 악행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29일 개봉하는 ‘끝까지 간다’(감독 김성훈)에도 비슷한 인물이 스크린 중심에 선다. 호탕한 외모를 지닌 창민은 악마와도 거래할 인간으로 묘사된다. 경찰 감찰반에서 일하면서도 그는 마약 밀매를 하고 일본 폭력조직 야쿠자와도 허물없이 지낸다. 모든 것을 자신의 손 안에 놓고 조정하는 그는 사람도 그저 물건처럼 감정 없이 대한다.
송 반장과 창민은 돈을 원동력으로 삶을 지탱한다. 그들은 돈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직업 윤리를 망각하는 경찰은 할리우드에도, 충무로에도 허다하다. 그런데 송 반장과 창민은 좀 특별하다. 그들에겐 ‘아스팔트 정글’에서 열거되는 딱한 사연이 없다. 거금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목적도 보이지 않는다. 병든 아내와 불치병에 걸린 자식도, 천국과도 같은 태평양 외딴 섬에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겠다는 꿈도 없다. 그들은 그저 부나비처럼 황금에 눈 멀어 손에 피를 묻힌다. 그들에게 경찰이라는 공적 직업은 그저 본능적인 돈벌이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송 반장과 창민은 돈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좀비와 같다. ‘아스팔트 정글’의 범죄자들과 달리 이들에게 연민이 가지 않는 이유다.
김기덕 감독의 신작 ‘일대일’에도 좀비 인생을 사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정보기관 요원으로 여겨지는 이들에겐 ‘영혼’따윈 없다. 국가를 위한다는 단순 명료한 신념조차 없다. 권력의 수족이 돼 부당한 완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며 “잘못은 위에 있다”고 변명한다. 이들을 단죄하는 사람들은 가진 건 분노 밖에 없는 바닥 인생들이다. 그들은 군인으로, 조폭으로, 때론 국가정보원 요원으로 분장한 채 양심 잃은 기관원들을 벌하려 한다.
김 감독은 힘 있는 자와 약자의 입장을 바꿔놓는 일종의 역할 놀이로 한국 사회를 들여다본다. 약자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폭력에 대해 점점 회의를 느낀다. 강자들은 다르다.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을 택하는 기관원은 단 한 명인데, 그 죽음의 의미마저 동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다. 바닥 인생은 잃을 것 하나 없는데도 자신이 속한 사회를 걱정하고 양심에 따라 움직이는데, 힘있는 자들은 도덕 불감증에 걸린 채 자신들을 향한 물리력을 “세상에 불만 많은 무능한 인간들”의 테러로 규정한다.
‘표적’과 ‘끝까지 간다’와 ‘일대일’ 속 인물과 이야기는 이제 낯설지 않다. 스크린 안팎에서 워낙 친숙해진 것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아스팔트 정글보다 더 무정하고 동정 없는 ‘강철 정글’ 속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라제기 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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