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계층 및 집단의 이익표출과 집약을 통한 갈등의 조정을 본령으로 한다. 나아가 사회균열을 제도권에 수렴하고 민의를 반영해야 할 당위를 지닌다. 이러한 본령과 당위를 다하지 못할 때 정치는 냉소적인 불신과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정치가 국민들의 삶과 미래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정치적 무관심이 고개를 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정치는 비로소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정치적 관심과 무관심은 동전의 양면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무관심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투표율의 저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대표성의 위기이다. 그러나 정치가 제 역할을 해내는 데 따른 안도의 무관심과 불신에서 연유하는 무관심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정치에 비견될 수 있는 존재가 국가다. 국가란 존재는 비상한 시기가 아니면 보통사람들에겐 사유의 대상이 아니다. 정치적 무관심 속에서도 정치적 관심은 일상이 되었으나 국가는 좀처럼 우리의 뇌리에 각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정부는 우리의 삶을 규정하다시피 한다. 국가와 정부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러나 국가의 양태는 천차만별이다. 국가와 사회, 국가와 시장,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자유주의와 공동체 주의의 논쟁,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반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복원력을 신봉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국가의 시장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통한 평등의 실현 쪽에 무게를 두는 민주주의는 대척점에 있다. 우리 사회에 내연하는 이념 갈등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보완과 상충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적절한 지점에 대한 합의의 부재에서 발생한다. 자본의 논리에 입각한 시장에 대한 신뢰는 시장주의와 연계되고 이는 황금만능의 물신주의와 불가분의 친화력을 갖는다. 국가경쟁력 강화는 거부할 수 없는 지상 명제가 되었고, 기업에 대한 규제 완화가 시장 제일주의와 결합하면서 규제개혁과 등치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이는 성장과 분배라는 고전적인 대척점을 넘어 인간과 자본 사이에 화해할 수 없는 간극을 형성한다.
인간과 자본의 대치는 인권 존중과 이윤 추구 중 양자택일을 강요당하는 지경에까지 내몰린다. 국가는 궁극적으로 자본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고전적인 마르크스적 입장이 아니더라도 현대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국민보다 자본과 이윤의 편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의 한계로 지적되곤 한다. 절차적 정당성을 담보한 대의제가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의 헌법 정신을 구현할 수 있을지도 여전히 의문이다.
압축성장이 국부의 창출을 가져왔다는 결과론과는 별개로 성장 과정에서 한국의 국가 영역은 극명하게 자본과 이윤의 편이었다. 성장 지상주의는 인간의 가치보다는 자본에 함몰되는 경제사회적 구조를 가져왔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공고화 이후에도 근대화 과정에서의 국가 우위의 구도가 고착화되면서 정치와 경제의 유착을 낳았고, 이는 관료와 민간의 상생이 아닌 공생이라는 기형적 구조를 초래했다.
세월호 참사는 바로 이러한 총체적 부조리 속의 낱개의 사실들이 씨줄과 날줄의 촘촘한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일어난 사고다. 국가의 책임은 그래서 엄중하고 막중하다. 그렇다면 책임을 져야 할 국가의 구체적 실체는 무엇인가. 헌법 7조 1항은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민심은 국가의 존재 이유와 국가의 책임을 준엄하고 엄중하게 묻고 있다. 국가는 이제 국민의 사유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세월호 참사 추모의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라는 민심의 메시지와 경고를 가벼이 넘겨선 안 되는 이유이다. 더 이상 국가는 ‘가만히 있으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국민의 물음에 답해야 한다. 국민이 주인인 나라에서 국민 전체에 대하여 봉사하고 책임져야 할 공무원이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관료적 집단이기주의에 여전히 머문다면 민심이라는 집단지성의 엄중한 심판에 직면할 것이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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