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전 10시 국립 5ㆍ18민주묘지. 5ㆍ18민주화운동 34주년 기념식이 시작됐으나 유족 정정순(84) 할머니는 묘역 입구 ‘민주의 문’아래 의자에 앉아 꿈쩍하지 않았다. 유족들과 관련 단체들이 지난해 이어 올해도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이 기념식에서 배제된 데 대한 항의로 불참키로 했기 때문이었다.
정 할머니는 “죽어서도 죽지 못한 아들에게 노래 한 곡 바치겠다는데 그걸 왜 막느냐”고 말했다. 안경 너머 주름진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치던 정 할머니는 25분만에 기념식이 끝나자, “아들에게 소주 한 잔 따라줘야겠다”며 묘역으로 들어갔다.
5ㆍ18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이번에도 반쪽 행사로 치러졌다. 기념 노래 제창 문제로 유족이 참석을 거부해 빈 자리는 국가보훈처가 동원한 ‘손님’들로 채워졌다. 기념식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240명 규모 전국 연합 합창단도 일당을 받고 급조된 것으로 알려졌다.
보훈처는 이날 5ㆍ18민주묘지 추모탑 앞에 1,500여개 좌석을 마련했지만, 피해자나 유가족 등은 보이지 않았다. 유가족 등의 불참으로 빈 자리가 생길 경우에 대비, 보훈처가 사전 접촉해 놓은 대한민국상이군경회 등 보훈단체 회원과 광주지역 중학생 등에게 자리를 메우도록 한 것이다.
사전에 악보를 나눠 주는 방식으로 행사 참석자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도록 하려던 광주광역시의 시도도 무위로 돌아갔다. 행사 의미에 공감하는 대신 동원된 탓인지 자리를 채운 참석자 대부분이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박준영 전남지사와 오형국 광주시 행정부지사 등 6, 7명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행진곡을 따라 불렀다. 기념식이 끝난 뒤엔 보훈처가 소속 공익요원을 동원, ‘일부 참배객들이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추모탑 밑의 박근혜 대통령이 보낸 조화에 대한 경비에 나서 빈축을 샀다.
정부와 유가족의 이견으로 이날 5ㆍ18 기념식장 주변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마찰이 이어졌다. 5ㆍ18부상자회 회원 추모(58ㆍ여)씨는 “억울한 피해자들은 행진곡 제창 금지를 빌미로 몰아내고, 퇴역 군인 등으로 빈 자리를 채워 주인 행세하게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기념식을 지켜보던 취재진과 일부 공무원 사이에선 “5ㆍ18기념식이 아니라 마치 현충일 기념식 같다”는 쓴소리까지 나왔다.
특히 전홍범 광주지방보훈청장의 5ㆍ18 경과 보고는 역사왜곡 논란까지 초래했다.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의 광주시민 해산 시도’라는 표현은 쿠데타 세력의 무자비한 폭력 행사를 불법집회 해산 정도로 왜곡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강기정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무자비한 총칼로 국민을 학살한 역사적 사실을 ‘해산 시도’라는 표현으로 왜곡하는 이 정권이 과연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있느냐”고 비난했다. 지난해 1월까지 5ㆍ18 기념재단 이사장을 지낸 김준태(65) 시인은 “역사는 정도(正道)로 가야 된다. 안 그러면 꺾이고, 오래 못 간다”고 비판했다.
광주=안경호기자 k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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