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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자연 깨닫고 나니... 격렬히 싸우던 피아노가 친구로

입력
2014.05.18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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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씨는 “최근 한국 클래식계에는 음악 자체보다는 요란한 포스터나 외모 등 포장술과 쇼맨십이 앞서는 듯 하다”며 본질의 훼손을 아쉬워했다. 배우한 기자 bwh3140@hk.co.kr
최영미씨는 “최근 한국 클래식계에는 음악 자체보다는 요란한 포스터나 외모 등 포장술과 쇼맨십이 앞서는 듯 하다”며 본질의 훼손을 아쉬워했다. 배우한 기자 bwh3140@hk.co.kr

압도적 연주력의 주인공으로 이해돼온 피아니스트 최영미(35)씨에게는 소중한 에움길이 두 군데 있다. 얼핏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장소지만 그것들은 그를 쉬게 하는 삶의 뒤안길이며 스스로를 추스르는 공간이다. 파주 탄현면 수풀 속의 커피 전문점, 오래된 성당 부속 건물 등 두 갈래로 난 길을 안내하며 그는 최근 맞닥뜨린 벅찬 감동을 이야기했다.

탄현면 대동리의 독특한 커피 제조 판매숍 ‘지노 프란체스카티’. 헤이리 예술마을 옆, 인적이 매우 드문 산 속에 있다. 2008년 완공한 18세기 조지언 양식의 2층짜리 건물. 미국 유학 시절 음악 전공자들과 알게 되면서 클래식에 심취한 사장 김민수씨는 그 곳을 종합 문화 예술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실행해 가고 있다. 일세를 풍미한 명 바이올린 주자 지노의 음악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라며 그렇게 명명한 것. 초청으로 2013년 5월 “재미 삼아” 참가하게 된 그 곳의 작은 콘서트는 지난해 7월 바흐의 ‘파르티타’로 발을 뗀 뒤, 3월의 무대까지 10회를 헤아렸다.

“동료, 후학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연스레 어울려 만드는 음악이 너무 좋아요.”그 자리에서 연주됐던 곡들은 아직 기억에 생생하다. “중세풍의 공간을 접하니 그간 소홀했던 실내악을 본격적으로 하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죠.” 베토벤의 피아노 3중주곡 ‘대공’이나 바흐의 플루트 소나타 같은 곡을 말한다. 고풍스런 그림들이 운치를 더하는 까닭에 드라마, 광고 촬영 장소로 진작에 잘 알려져 있던 곳이다. 지금껏 국내에서 그런 분위기는 코스프레 등 과시적ㆍ상업적 용도로만 쓰여왔던 터다.

또 다른 곳, 경기 양주시 어둔동의 천주교 수련원 ‘한마음 수련원’은 보다 본질에 닿아 있는 곳이다. 가톨릭 집안이어서 예닐곱 살부터 부모의 손을 잡고 자연스레 가게 됐던 곳이다. “도시와 접근성은 우수하나 속세와 격리된 듯한 기분을 주죠. 자연적으로 조성된 울창한 수풀이 압권이에요.”옆의 호수 덕에 더욱 고즈넉하단다. 문제는 거기 무심한 듯 놓여진 낡은 피아노. 종교적 의미가 없다면 눈 여겨 볼 것이라곤 도저히 찾을 수 없지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다.

“진정한 창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면서, 은연중 습관적으로 연주하고 있는 자신을 반성하게 하죠.” 과연 겸손은 최고의 선물이다. 원래 쇼팽을 좋아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모르게 진부한 연주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쇼팽을 완전히 재해석하게 된 계기였다. 겨울에 미국 마이러 헤스(Myra Hess)재단 초청 기념 연주회에 출연한다. FM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펼쳐질 쇼팽의 발라드 4곡은 낡은 성당 피아노에 큰 빚을 지게 될 것이다. “예술은 자연이다. 음악은 자연에서 온다.” 마치 경구 같은 말을, 그는 이 시대에 들려주고 싶은 모양이다.

7년 간의 안달 끝에 늦둥이를 갖게 되면서 그는 분명 달라져 있었다. “29개월 된 아들 하나예요.” (불가피하게) 피아노 음악을 많이 들어 그런지 음악적 감수성 뛰어나다는 말은 그렇다 치고 “유치원에서 자장가를 틀어 주는데 (선율이)슬퍼서 잠을 못 자더라”는 말까지 믿어야 할까.

옛말에 유능제강(柔能制剛), 즉 부드러움이 능히 강한 것을 이긴다고 했다. 어느덧 그는 근본주의적으로 달라져 있었다. “그늘이 있는 소리를 내고 싶다”고 했다. 늘 밝은 표정 속에 웅크린 어떤 깊이가 느껴지는 말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에 조금만 기대보자.

“두드리는 주법을 많이 하다 보니 그게 습관으로 굳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팔 근육을 이완(relax)시켜 숨쉬듯 연주하는 길을 체득하게 됐죠.”이전에는 속도와 힘에 많이 의존했다면 깨침 이후로는 자연스런 호흡을 기본으로 해, 유려한 아리아처럼 깊은 소리를 내게 됐다. “건반을 누르는 게 아니라 애무하듯 연주하죠.” 싸우고 격돌하던 대상이던 피아노가 친구처럼 가장 친한 존재로 거듭났음을 문득 알게 된 것이다. “만일 그런 게 없었다면 불나방처럼 앞만 보고 쫓아 가다 빨리 지쳤을 거예요.” 좀 과격한 표현. “격렬함을 우선 내세우기 십상이었던 이전의 연주 방식에서 익어가는 김치나 장의 맛을 띠게 되요.” 그는 “그늘이 있는 소리를 내고 싶다”고 했다. 전경보다는 배경을, 혹은 뒷모습이나 눈에 띄지 않는 모습을 건져 올리는 연주를 말한다. 그 대목에서 김지하 시인의 ‘흰 그늘’을 떠올렸던 것 같다. 프로 연주자로서 그는 어떤 본질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너지와 강렬함의 피아니스트”“건반을 장악하는 불꽃같은 열정” 등의 수식을 달며 젊어 국내외 콩쿨을 휩쓸던 그는 이제 낮출 줄 안다. “바흐의 대작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할 가량은 충분하나 확실한 자신이 설 때까지는 그 곡으로 사람들 앞에 서지 않겠어요.”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게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들. “슈베르트가 31세로 세상을 뜬 해에 쓴 소나타 D(슈베르트 작품 번호)958, 959, 960을 모두 연주해 보고 싶어요.”삶과 죽음의 의미를 조망해 보고 싶다는 것이다. 외부의 평가에는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 해석으로 섬세하고도 진솔한 내면을 보이고 싶다는 욕구다.

뒤늦게 발견한 재즈도 그 중 하나일까. 지난 3월 올림푸스홀에서 생애 최초로 재즈를 공연하기에 이르렀다. 솔로 재즈 피아노의 걸작으로 꼽히는 키스 재릿의 대곡 ‘쾰른 콘서트’를 연주했다. 정상급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정규 레퍼토리로 재즈를 공연한 것은 전례 없던 일. 이 낯선 곡을 익히기 위해 그는 재즈 뮤지션을 한 달 동안 사사하는 가욋일을 감수했다. “재즈로 작곡을 꼭 하고 싶다. 재즈는 내게 너무나 즐거운 소풍이다.”죽을 때까지 클래식의 새 레퍼토리를 발굴해 가겠다는 다짐도 함께 하니, 세계적으로도 별난 피아니스트의 탄생을 목도하는 셈이다.

장병욱 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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