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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필킹턴 가리마라... 그녀의 용기에 국가가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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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필킹턴 가리마라... 그녀의 용기에 국가가 고개를 숙였다

입력
2014.05.1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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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필킹턴은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나 역시 실제로 내 부족의 전통을 경멸했고 그들을 부끄러워했다. 우리는 피부색이 검을수록 열등하다고 배웠다”라고 말했다. 리오 틴토원주민 펀드는 2007년 도둑맞은 세대 생존자들의 증언을 확보하기 위한 재단을 설립했다. 재단 사이트(http://stolengenerationstestimonies.com)에서 수많은 이들의 사연을 들을 수 있다.
도리스 필킹턴은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나 역시 실제로 내 부족의 전통을 경멸했고 그들을 부끄러워했다. 우리는 피부색이 검을수록 열등하다고 배웠다”라고 말했다. 리오 틴토원주민 펀드는 2007년 도둑맞은 세대 생존자들의 증언을 확보하기 위한 재단을 설립했다. 재단 사이트(http://stolengenerationstestimonies.com)에서 수많은 이들의 사연을 들을 수 있다.

5월 26일은 '국가 사과의 날'

호주 원주민 '도둑맞은 세대'

수용시설 탈풀했던 몰리 켈리의 장녀

오는 5월 26일은 호주 의회가 정한 ‘국가 사과의 날(National Sorry Day)’이다. 호주 백인정부가 과거 흑인 원주민에게 범한 야만적인 일들을 잊지 말자는 취지, 비슷한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하자는 취지로 1998년 지정됐다.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나 점령국에 가한 약탈과 학살 등 악행은 보편적인 역사지만, 호주가 기억하려는 것은 좀 특별하다. 국가가 혼혈 아이들을 부모와 혈족의 품에서 강탈해 집단시설에 수용한 뒤 교육과 노동으로 원주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세탁한, 그럼으로써 백인화한 역사에 대한 사과다.

그 만행은 합법적으로 또 장장 두 세대 이상(1905~1970) 지속적으로 자행됐고, ‘국가 유괴’로 최소 10만 명의 아이들이 끌려 갔다.(호주인권기회균등위원회, 1997년 ‘Bringing Them Home’ 보고서) 자신의 언어와 종교와 관습과 핏줄을 도둑맞은 그들이 이른바 호주의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다. 호주 연방정부의 첫 공식 사과는 2008년 2월 13일 이루어졌다. 케빈 러드(노동당) 당시 수상은 의회 연설에서 “We are sorry”를 연발했다.

‘도둑맞은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상처를 극적으로 증언하고 대변함으로써 호주의 국가적 양심과 인류 보편윤리의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내딛게 한 원주민 작가 도리스 필킹턴 가리마라(Doris Pilkington Garimara)가 4월 10일 영면했다. 향년 76세(추정). 그는 한국에도 번역 출간된 책 토끼 울타리(황금가지, 2003, 원제 )의 저자이자, 백인 수용시설을 탈출해 장장 1,000마일(약 1,600km)을 걸어 가족 품으로 돌아온 토끼 울타리의 실제 주인공 몰리 켈리(Molly Kelly, 2004년 작고)의 장녀다.

1931년 7월, 호주 북서부 깁슨 사막 인근 원주민 마을 ‘지갈롱’의 14살 몰리는 동생 데이지(당시 8살), 사촌동생 그레이시(당시 10살)와 함께 백인 경찰에 의해 끌려간다. 부모는 저항도 못한 채 통곡만 하고 할머니와 친척들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려는 부족 전래의 방식대로, 돌을 들어 제 머리를 찧으며 함께 아파한다. 그들 형제는 흑인 원주민인 어머니 모드가 ‘토끼 울타리’ 감독관이던 백인(토머스 크레이그)과 낳은, 마을 최초의 혼혈아였다. 토끼 울타리는 동부 지역의 야생 토끼들이 서 호주 목장의 목초를 못 먹게 막자는 취지로 호주 정부가 1907년 세 갈래로 나누어 설치한 총 연장 2,023마일(3,256km)의 철조망. 그 철조망의 한 기점이 몰리의 고향 지갈롱이었다.

자동차와 기차, 전차와 배로 근 보름을 달려 아이들이 끌려간 곳은 호주 남서부 끄트머리 퍼스의 북부 ‘무어강 원주민 거주시설’이었다. 창문마다 창살이 달린 사실상의 집단수용소. 첫 밤. 낯설고 두려운 데다 얇은 담요 한 장으로 겨울 우기의 한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책에는 “그날 밤 세 아이는 한 침대에서 꼭 부둥켜안고 잠이 들었다”고 적혀 있다. 아이들은 부족 언어(마르두 왕카)를 쓰면 혼이 났고, 성경을 읽고 주기도문을 암송해야 했다. 하지만 몰리를 분노하게 한 것은 수녀의 말 한 마디였다. “우리에겐 엄마가 없다고 했다. 우리 말은 말이 아니라고 했다.”

며칠 뒤 아침, 수용소 아이들이 예배를 보러 교회로 이동한 사이 몰리는 “엄마에게 가자”며 두 동생을 이끌고 숲으로 도망친다. 고향에서 어릴 적부터 익힌 사냥 기술과 감각, 그리고 토끼울타리만 찾아 따라 가면 아무리 멀어도 집에 닿는다는 확신이 그에게 있었다. 그들은 헬기와 경찰력까지 동원한 백인 권력의 추적을 피해가며, 지도도 나침반도 없이 난생 처음 맞닥뜨리는 사막과 벌판과 숲을 헤쳐가며, 사냥과 구걸로 허기와 추위와 공포를 견뎌가며, 또 상처로 곪은 발의 통증을 참고 칭얼대는 동생들을 번갈아 업어도 주면서 장장 9주일 동안 거의 맨발로 호주 대륙을 종단한다. 그리고 성공한다. 수용소 탈출에 성공한 예는 몰리 일행이 처음이었다. 아이들을 추적하느라 막대한 예산을 써버린 원주민보호국은 몰리와 데이지를 내버려둔다.

하지만 시련은 끝이 아니었다. 백인 목장의 하녀로 살며 목부(牧夫) 토비 켈리와 결혼, 도리스와 애너벨을 낳은 몰리는 1940년 11월 맹장염으로 수술을 받은 직후 두 아이와 함께 다시 무어강 원주민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9개월 뒤, 4살이던 도리스는 남겨둔 채 18개월 된 애너벨을 안고 다시 탈출, 지갈롱으 남편과 재회하지만 3년 뒤 애너벨을 또 빼앗긴다. 몰리는 숨질 때까지 애너벨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탈출 도중 이탈했다가 붙들려 수용소로 끌려간 그레이시는 농장과 목장의 하녀로 살다 1983년 사망했다. 그레이시 역시 숨질 때까지 가족과 친척을 만나지 못했다.

한편 수용소 교육을 마친 16살의 도리스는 백인 가정의 가정부가 되기를 거부하고 간호보조사 교육을 받는다. 결혼해서 네 아이를 낳지만 그의 결혼생활을 불행했던 듯하다. 작가로 유명해진 뒤 호주의 페미니스트 저널인 ‘Hecate(마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남편은 아주 완고한 사람이었다. 가끔은 다감했지만 자신이 원할 때만 드물게 다감했다”고 대답했다.

퍼스에 살던 도리스가 엄마 몰리를 찾아가 만난 것은 헤어진 지 21년만인 1962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결혼 후 퍼스의 커틴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하고 서호주 영화텔레비전협회에 취직, 글을 쓰기도 했던 도리스는 그의 가족사와 호주 원주민 여성의 삶을 소재로 한 중편소설 변화; 한 목부의 딸(1991년)을 발표, 원주민 작가 데이비드 우나이폰의 이름을 딴 ‘데이비드 우나이폰 상’을 탄다. 엄마 몰리의 ‘대장정’ 스토리를 취재하기 위해 해마다 6~8주씩 고향을 찾아가 이모 데이지와 대화했고, 그렇게 자신의 잃어버린 원주민 언어도 익혔다. 토끼 울타리는 1996년 출간돼 11개국 언어로 번역됐고, 도리스는 호주예술위원회가 주는 레드오커(Red Ochre)상을 탄다. 하지만 몰리의 이야기, 도둑맞은 세대의 이야기는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2002년 개봉한, 호주 출신 세계적 감독 필립 노이스의 영화 ‘토끼 울타리’를 통해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킨다.

영화 ‘토끼 울타리’에 대한 호주 정부와 백인 보수사회의 훼방과 트집은 꽤 집요했고, 그것이 흥행에는 큰 도움이 됐다. 배급사인 미국 미라맥스사는 당초 저예산 영화 ‘토끼 울타리’를 중소도시 몇 곳에서 처음 상영한 뒤 반응을 살필 계획이었다고 한다.(가디언, 2002. 10. 25) 그런데 그 해 5월 당시 국무장관이던 에릭 아베츠가 영화의 진실성 등을 문제 삼으며 연방 기금(375만호주달러)을 들여 논박할 것이라고 선전포고를 한다. 보수 언론과 비평가들의 공세도 집요했다. 한 원주민 노인의 흐린 기억에 의존한 허구다, 얼마 되지도 않는 불행한 아이들이 ‘세대’를 대표할 수는 없다, 책도 부실하지만 영화는 더 악의적이다 등등.

원주민 과거사 문제의 폭발력을 의식한 탓인지 감독의 미학적 판단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으나, 노이스의 영화에 격정적인 장면은 별로 없다. 오히려 호주 남서부의 황홀한 영상미로, 얼핏 봐서는 흥미진진한 로드무비 같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몰리를 영웅적인 여전사로 만들지도 않았고, 인종주의자였던 서호주 원주민보호국장 A.O 네빌조차 선의의 온정주의자로 그렸다. 1940년 퇴임할 때까지 25년간 원주민보호국장을 지내며 호주 서부 모든 원주민의 법적 후견인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인물인 네빌은 1937년 한 컨퍼런스에서 “(후손들에게) 수백만 명의 흑인과 한 공동체에서 계속 살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을 백인화함으로써 호주에 원주민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살게 할 것인가” 반문하며 자신들의 정책을 옹호하기도 했다.(가디언 2014. 5.7)

2002년 2월 개봉과 동시에 영화는 대도시 멀티플렉스로 곧장 진출했고, 해외로도 팔려나갔다. 미국판 영화 포스터에는 “만일 정부가 당신의 딸을 납치한다면?”이라는 문구가 적혀 호주 정부가 사과와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인종주의 프로그램으로부터 탈주한 원주민 소녀들’이란 제목의 리뷰 기사를 통해 “다른 문화를 짓밟으면서 스스로 옳다는 확신과 품위를 과시하는 자들이 이 영화를 본다면 매서운 따귀를 맞게 될 것이다”라고 썼다.(NYT, 2002. 11.29) 영화는 노르웨이로도 수출돼 그들의 집시 박해를 떠올리게 했고, 이스라엘인들에게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유럽과 미국에서는 아프리카 노예 착취를 환기시켰다.

도리스는 시나리오 공동작가로 참여했다. 그는 프리미어 행사 때마다 영화는 못 보고 질의응답시간에만 참여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그레이시를 볼 때마다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다시 붙잡혀 간 뒤 백인가정의 하녀로 백인처럼 살면서 친지들과 모든 접촉을 거부했다”고 말했다.(가디언, 2002.10.27) 영화는 그 해 호주영화위원회의 최우수영화상을 탄다.

제국주의 시절, 마오리족이라는 막강한 단일 전사(戰士)부족이 존재하던 뉴질랜드와 달리 호주에는 혈족 중심의 수백 개 군소 부족이 있었고 백인들의 정착(사실상의 침략) 과정에서 대규모 충돌도 드물었다. 소부족 중심의 호주 원주민에게는 너른 땅이 필요 없었고, 자신들이 머무는 땅이 존재의 중심이었으므로 익숙하지 않은 지역으로의 이동도 드물었다. 즉 “다른 부족 영토는 근접해 있는 지역의 원주민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호주 원주민의 문화는 팽창주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다른 부족을 희생시켜 점령지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포함하는 전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F.G 클라크 저 호주의 역사) 백인이 기록한 호주의 공식 역사는 피를 뿌리지 않고 정착해서 원주민과 조화한 점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클라크의 책에도 세대의 기억과 정체성을 도둑질한 사실은 기록돼있지 않다.

호주 연방정부가 사과하기까지 기나긴 줄다리기가 있었고, 땅과 함께 정체성을 잃어버린 다수의 원주민들은 2등 시민으로, 술과 마약으로 황폐해져 갔다. 호주 비원주민으로서 조국의 어두운 역사를 고발한 첫 지식인 세대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 인류학자 윌리엄 E H 스태너다. 그는 150여 년에 걸쳐 원주민 사회에 자행된 파괴와 약탈의 역사에 대한 정부의 외면을 ‘거대한 호주의 침묵(Great Australian Silence)’이라 불렀다. 진보 학계와 원주민 단체의 요구에 1992년 폴 키팅(노동당) 정부는 약탈과 살인, 문화와 생활양식의 파괴 사실을 제한적으로 인정했지만 사과는 거부했다. 97년 의회 인권위원회 보고서가 나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자유당 존 하워드 정부(1999~2007)는 ‘사과(Sorry)’가 아니라 역사적 흠집(blemish)에 대해 ‘유감(Regret)’이라고 말했다. 하워드 당시 수상은 선조들의 행위에 대해 현 수상이 사죄할 수는 없다고 했고, 그들의 행위가 그릇된 것이긴 하나 선한 의도였던 만큼 사죄할 일이 아니라고도 했다.(가디언, 2013.5.26)

지난 2월 케빈 러드 전 수상은 ‘국가 사죄 기금(National Apology Fund)’을 발족하고 초대 의장을 맡았다. 그는 “우리는 우리 역사의 원주민성을 감추려 하기보다 더 확장된 국가적 정체성의 하나로 끌어안아야 한다. 우리는 원주민과 비원주민 사이의 삶의 간극으로 하여 미래 세대로부터 비난 받지 않아야 한다”고 연설, ‘토끼 울타리’로 깎아먹은 호주에 대한 세계인의 인상을 만회했다.

도리스는 화해위원회의 창립 멤버로서, 또 국가 사과의 날 제정의 핵심 발의자 가운데 한 명으로 활약했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부고 기사에서 도리스의 마지막 소원이 고향 지갈롱에 들르는 것이었다고 보도했다. 도리스는 숨지기 3주 전 몰리가 그를 낳았던 부족의 성목(聖木) ‘윈타마라’ 나무 아래에 앉아 긴 영적인 시간을 보냈고, 퍼스로 돌아와 혈족들의 기도 속에서 엄마 곁으로 영원히 떠났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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