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사람들이 흠뻑 빠졌던 드라마가 있다. ‘응답하라 1994’가 바로 그것이다. ‘응답하라 1997’의 시간을 더 앞으로 당기면서 따뜻함과 재치와 애수가 함께 아울러서 많은 이들에게 그리움과 향수를 담뿍 느끼게 해줬다. 특히 당시의 상황을 애틋하게 되돌아보게 만들어준 소품들은 그야말로 ‘디테일의 정수’를 마음껏 발휘하면서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왜 그 시절이 그리울까? 왜 하필 90년대였을까? 나름의 의도가 있었겠지만 상대적으로 가장 행복한 시절을 구가했던 40대들이 정신없이 살아온 시간을 잠시 더듬어볼 수 있는 여유와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어찌 그들이라고 느긋하고 마냥 풍요롭기만 했을까. 나름대로 맵고 신 시절을 겪었는데. 1997년 외환위기는 이들에게 처음으로 겪은 역경이었을 것이다. 교복 자율화를 비롯해 자유와 풍요를 누리던 이들이 사회에 나오자마자 맞은 매운바람은 납작 엎드려 살아야 하는 셈법을 터득하게 했다. 그리고 한숨 돌리며 그 이전의 따뜻한 시절을 되살려볼 여유가 생겼다. 그들의 선배는 설국열차 끝 칸으로 내몰렸지만 사회초년병들에겐 다행히 매달려 버틸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후배는 아예 열차에 올라타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모두가 피폐한 시절을 겪었다.
최근의 인문학 열풍이 나로서는 두렵다. 왜냐하면, 정작 인문학이 무엇인지, 왜 그 바람을 타는지조차 모르는 채 그냥 유행처럼 따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다. 혹독한 구조조정을 통한 대량 실업의 공포는 사람들을 자기계발의 광풍으로 내몰았다. 혹여라도 도태될까 봐 부지런히 매달렸다. 그러나 아무리 그걸 따른들 별로 변하는 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후 위로를 거쳐 힐링으로 흐름은 변했지만 셀프힐링에 그칠 뿐 근원적인 것은 바뀌지 않았고 때론 더 악화될 뿐이었다. 이것저것 읽은 책도 많았지만 정작 남은 것은 없고 공허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실체는 애매했다.
20세기 후반까지는 패스트무빙의 사회였고 다행히 한국사회는 높은 교육열과 강도 높은 노동력의 희생 덕분에 어느 정도 따라잡았다. 그러면서 ‘사람의 값’은 뭉개지고 삶의 본질은 망가졌다. 다만 어느 정도의 물질적 풍요로 보상을 삼으며 버텼다. 그러나 이미 세상은 퍼스트무빙으로 전환하고 있었고 그것에 대처하지 못한 우리 사회구조는 몰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 바로 외환위기였다. 그 질곡을 통과하며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삶을, 사람을 잃고 살았다는 회한을 느꼈다. 그것을 채워준 것이 바로 인문학이었다. 따라서 인문학은 사람의 값을 회복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그런 반성과 성찰이 결여된 채 새로운 교양의 포장지로, 부가적으로 채워야 할 또 다른 스펙으로 접근한 인문학이 광풍처럼 휩쓸고 있다. 해석도 없고 성찰도 없으면서 적당한 지식을 긁어모으거나 고답적 고전 강독으로 대체하는 인문학의 유행은 그래서 불안하다. 결국 1997년 프레임에 대한 뒤늦은 반성조차 없는, 불구적 인문학의 도래일 뿐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바로 그런 회한과 위로와 향수를 따뜻하면서도 재치있는 시선으로 펼쳐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호응을 받았다. 이제라도 그 프레임을 완전히 깨뜨려야 한다. 그 긴 질곡의 시간을 힘겹게 견뎌왔다. 계속해서 망가지며 살 수는 없다. 그건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잘나고 힘센 사람은 퍼스트무빙의 흐름을 막기 쉽다. 이전의 프레임에 익숙한 까닭에 혹은 그것이 그들에게 유리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미래는 더불어 협력하고 연대하면서 창조의 힘을 발현해야 한다. 그게 지금 우리의 당위이다. 다시 1997체제로 갈 수는 없다. 그런데 세월호에 희생된 아이들이 주로 1997년생이란다. 매운 시기에 태어나서 힘겹게 살다가 차갑게 마감한 그 아이들. 새삼 안쓰럽고 미안하고 부끄럽다. 응답하라 1997! 깨뜨려라. 1997!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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