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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조사 맹신이 망신으로

입력
2014.05.15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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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가 증명… 딴소리 말라" 후보 공천, 정책 결정 등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이비 민주주의" 지적도

#사례 1. 2010년 6ㆍ2 지방선거 당시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오세훈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서울시장 후보 캠프는 술렁였다. 경쟁자인 한명숙 민주당(새정치민주연합 전신) 후보가 47.2%를 기록하며, 오 후보(47.4%) 턱 밑까지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당시 각종 여론지표상 한 후보를 꾸준하게 20%포인트 안팎으로 따돌리며 낙승을 기대한 오 후보 측은 시종 뒤처지다 이튿날 오전 0.6%포인트 차이로 역전할 때까지 가슴을 졸여야 했다.

#사례 2. 참여정부 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핵심 추진과제 중 하나였다. 정부 부처를 포함해 다수 조사기관에서 한미FTA 체결에 대한 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잇달아 발표했고, 결과는 ‘체결 찬성’이 70~80%대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2006년 7월 여론조사기관 리서치앤리서치가 실시한 조사(전국 800명 대상 전화면접,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3.8%포인트)에선 응답자의 72%가 ‘한미FTA의 구체적 내용을 모른다’고 답변했고, ‘한미FTA가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응답도 17%를 넘었다. 한미FTA의 내용을 모르는 다수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찬반을 물은 셈이다.

정치권에 만연한 ‘여론만능주의’

이들 사례는 여론조사의 역기능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전자는 정당이 선거를 앞두고 여론조사 결과에 안심하다가 낭패를 볼 뻔한 경우이고, 후자는 논란을 초래할 수 있는 정부 정책을 국민들이 수용하게 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경우다. 결국 이명박정부에서 폭발했던 한미FTA 비준 여부를 둘러싼 극심한 갈등은 이전부터 잠복돼 있던 셈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여론조사는 정당뿐 아니라 정부에서 정책 수립 이전에 민의를 수렴하는 순기능이 적지 않다. 다만 여론조사로 읽을 수 있는 민심은 시시각각 바뀐다는 데 함정이 있다. 여론조사는 사진으로 치면 특정 순간의 스냅샷이다. 인물이나 풍경 사진은 시점과 촬영 각도에 따라 잘 나올 수도 있고 못 나올 수도 있는 법이다. 이를 감안하면 여론조사는 민심 추이를 판단하는 참고 자료일 뿐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정부 정책이 오락가락하거나 정당이 공천과 당론 결정을 내리는 등 ‘여론조사 만능주의’가 위험수위에 이르렀다는 지적이다.

각 정당에서는 여론조사에 의존한 후보자 공천과 경선이 일반화됐고, 대선에서도 후보 단일화와 같은 정치적 결단 순간에도 여론조사가 판단 지표로 활용되고 있다.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ㆍ정몽준 후보는 여론조사를 통해 단일화했고, 지난 대선에서도 문재인ㆍ안철수 후보도 단일화 과정에서 여론조사를 검토했다.

이번 6ㆍ4 지방선거에서도 여론조사가 여야의 후보자 공천 여부를 좌우하는 주요 변수로 꼽히면서 공정성 논란에 따른 불복 사례도 적지 않다. 심지어 새정치민주연합에선 지난달 9일 기초선거 무공천 여부를 당원과 국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 의해 결정함으로써 ‘책임정치 실종’ ‘여론조사 정당’이라는 비아냥이 쏟아졌다.

조사상 오류 가능성 인식해야

전문가들은 여론조사가 오류 가능성을 갖고 있는 만큼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로 활용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때문에 정부가 세대간 진영간 갈등을 초래할 수 있는 정책을 입안하는 과정에서 여론조사 결과를 들어 국민들에게 일방적 수용을 강요하기 보다, 반대세력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설득에 나서는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여론조사 결과는 표본과 질문 구성에 따라 다르고, 조사방식도 전화면접이냐, 자동응답시스템(ARS)이냐에 따라 다르다”며 “요즘처럼 광역뿐 아니라 기초단위까지 포함해서 여론조사가 쏟아지면 응답률이 떨어져 편차가 클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최근 각 정당에서 100% 여론조사로만 공직 후보자를 선택하는 것은 사실상 ‘사이비 민주주의’”라며 “세월호 참사로 경선 분위기를 조성할 수 없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여론조사에 의존하는 것은 정당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배종찬 리서치앤리서치 본부장은 “언론사들도 ‘경마식 선거’보도에만 익숙한 나머지 선거철마다 남발되는 여론조사 기관의 결과를 아무 검증 없이 보도해선 안 된다”면서 “대중의 여론조사에 대한 오해는 조사기관은 물론 이를 보도한 언론사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허경주기자 fairyhk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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