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한 달이 다 돼간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럼에도 충격과 울분은 가시지 않는다. 창문 뒤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승객들을 보고도 뒷짐만 진 채 수백명의 생명이 산 채로 수장되는 것을 방치한 해경 같은 재난당국의 야만성을 보고 어떻게 마음을 추스를 수 있겠는가. 진도 앞바다에는 아직도 20여명의 실종자들이 어두운 바다 밑에 잠겨 있고, 자식 잃은 부모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으면 끝날 것 같지 않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
한 달 동안 달라지지 않은 건 이런 참담함만이 아니다.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반복됐던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라는 사람이 한다는 소리가 “청와대는 재난컨트롤타워가 아니다”라고 발뺌하고, 사태 수습에 발이 닳도록 뛰며 국민과 희생자들에게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야 할 내각의 수장은 ‘사퇴’라는 편리한 말 한마디 뒤로 숨으면서 그것도 “국정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라는 이유를 내세운다. 구조 실패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해경은 수사정보를 유착기관에 흘려 이들을 비호하려는 작태까지 보였다. 책임규명 목소리가 정치권에서는 이념공세로 변질되고, 박근혜 정부 책임론은 여론을 희석시키기 위한 보수세력의 정치무기로 둔갑하는 분위기다. 뉴욕타임스에 실린 재미동포들의 정부비판 광고를 “정치적 선전이며 악용”이라고 ‘해석’하는 집권당 대표나 교육부장관의 ‘컵라면’을 해명한답시고 “라면에 계란을 넣은 것도 아니고, 끓여먹은 것도 아닌데…”라고 하는 청와대 대변인이 모인 정부에서 세월호의 교훈을 얻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세월호가 침몰한지 얼마 안돼 지하철 상왕십리역에서 전동차가 신호기가 나흘 동안이나 고장이 나있었는데도 그대로 방치된 채 운행하다 충돌하는 사고가 났다. 6일 뒤에 또 신호기 고장으로 지하철 1호선이 멈춰 섰다. 충남 태안과 울릉도, 거제도에서는 여객선이 잇따라 엔진고장을 일으켜 회항하기도 했다. 안전불감증의 관행 탓이었다고, 세월호 참사도 겪었으니 앞으로는 다를 것이라고 위로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제 실시한 서울 강남 코엑스 화재대피 훈련은 뭐라고 변명할 것인가. 전체 입주 직원 9,000여명 중 4분의 1 정도만이 훈련에 참여했고, 나머지는 대피방송을 듣고도 오불관언이었다. 대피하면서도 키득키득 웃거나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느니, 어린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말자느니 외치면서 처음 한 대규모 대피훈련에서 보인 우리의 모습이다.
언론은 어떤가. 한쪽에서는 정부에 대한 무분별한 비방과 흑색선전을 그대로 옮겨 적고, 다른 쪽에서는 국민의 분노와 비판을 ‘반이성’ ‘유언비어’로 몰아가며 오히려 정쟁을 부추기고 증폭시키고 있다. 보도국장이 “세월호 사고로 300명이 한꺼번에 죽어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를 보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라고 한 KBS의 행태는 거론하기조차 낯뜨겁다.
9ㆍ11 테러 사흘 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소방관의 어깨를 두른 채 ‘그라운드 제로’에 섰을 때 뉴욕 시민은 “유에스에이(USA)”를 연호했다. 잿더미 속에는 성조기가 꽂혔다. 부시의 지지율은 거의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 우리와 왜 이렇게 다른가. 9ㆍ11 테러는 외부의 적에 의한 것이었고, 세월호는 내부의 적 때문이어서라고 할 것인가. 우리에게 9ㆍ11 같은 사건이 터지면 대통령 밑으로 똘똘 뭉칠 수 있는가. 서해훼리호 침몰,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 방화 등 숱한 참사를 겪었으면서도 교훈을 얻지 못하는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개조해야 하나.
박근혜 대통령이 조만간 대국민담화를 발표한다고 한다. 관료개혁을 포함, 국가개조에 버금가는 대대적인 쇄신책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쇄신의 대상이 돼야 할 썩은 관료와 정치인이 주도하는 쇄신안에서 올바른 개혁이 나오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1년 후인 2015년 4월16일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에게 ‘우리는 이것밖에 하지 못했습니다’라는 자책을 지금부터 해야 할 판이다.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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