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계약서 체결을 거부해 임금을 정상적으로 지급할 수 없다. 관할 법원에 공탁했으니 참고 바란다.’
서울대 어린이병원 청소노동자 A(48)씨는 지난 10일 월급날 급여를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대신 날아온 것은 공탁 사실을 알리는 이런 내용증명 한 장이었다. A씨는 “청소 일이 끝나면 저녁에 식당에서 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할 정도로 생계가 어려운데 월급이 나오지 않아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손해배상 담보나 변제 등을 위해 금전을 임시로 법원 공탁소에 맡기는 공탁이 청소노동자와 용역업체 간 노사문제에까지 등장했다. 노동자들은 “노조 압박용 수단”이라고 반발하지만 업체 측은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아 정상 지급할 수 없다”고 맞서는 상황이다.
13일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 서울지역지부 등에 따르면 서울대병원은 지난달 1일 T사와 어린이병원 청소용역계약을 체결하고, 다른 병동들은 G사와 계약을 새로 맺었다.
약 180명의 청소노동자 고용을 승계 받은 G사는 근로계약서 작성 여부와 관계 없이 4월 임금을 지급했지만 T사는 승계한 40명 중 근로계약서와 서약서 등을 제출하지 않은 약 20명의 임금을 공탁했다. T사는 이달 16일까지 근로계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사규에 따라 조치하겠다고 통보, 임금은 4월 분에 이어 이달 분도 지급이 불확실한 상황이다.
이에 청소노동자들은 지난 12일 낮 종로구 서울대병원 본관에서 집회를 여는 등 T사의 임금 공탁을 규탄하고 있다. 이들은 단체협약 없이 기존 정년 63세가 60세로 줄어든 데다 시용(수습)기간 3개월이 추가되는 등 근로조건이 후퇴한 T사의 근로계약서에 서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공공운수노조 관계자는 “근로계약을 관철시키기 위해 공탁을 신종 협박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론을 듣기 위해 수 차례 접촉했지만 T사 측은 공탁 관련 답변을 피했다.
전문가들은 공탁 자체가 부당노동행위는 아니지만 노동자 개인에게는 우회적인 압박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우지연 민주노총 법률원 변호사는 “근로조건 협상 과정에서 공탁을 건 사례는 못 본 것 같다”며 “나이가 많은 청소노동자들은 공탁이란 개념에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강민주 노무사는 “공탁은 채무 변제에 어울리지 노사관계에 어울리는 용어가 아니다”며 “노동을 제공했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근로계약 체결 없이 한달 넘게 노동자들이 일을 계속 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서울대병원 측은 “합의를 독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아름기자 archo1206@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