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어수선할 때 남도의 곰삭은 옛집 마당 걸어본다. 또 묵은 정자에 앉아 천연한 자연을 폐부에 한가득 담아본다. 외갓집처럼 질박한 정서가 일상의 생채기 푸근하게 어루만져 줄 거다. 인적 드물어 사위 한갓지면 효과 두 배다. 해 봐야 안다. 전남 장흥 땅에 이런 곳들 많다. 수수한 정자와 안마당 구경하라고 이 먼데까지 가라는 말은 아니다. 장흥은 문학의 고장이다. 이청준, 송기숙, 한승원, 김영남…. 한국 현대문학을 이끈 숱한 문인들이 이 땅에서 나고 자랐다. 이들에게 문학적 영감을 선사한 남도의 꾸밈없는 삶과 질펀한 풍경이 사방천지 널렸으니 먼저 이것들 두루 구경한다. 이러면 소박한 옛집 마당과 정자에서도 진한 문향(文香) 느끼게 된다. 화려하지 않지만 시나브로 정(情)이 가는 이유다.
○ 고영완 가옥과 방촌마을 고택들
먼저 해야 할 일. 회진면을 중심으로 조성된 ‘문학길’ 찾아본다. 총 4구간인데 이청준생가가 있는 진목마을, 그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의 무대가 된 선학동, 덕도에 있는 소설가 한승원생가 그리고 대덕읍 천관산 아래 천관산문학공원까지 유명한 문학 명소 두루 거친다. 장흥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에 이 길 자세히 소개돼 있다. 여기에다 안양면 율산마을 한승원 집필실 ‘해산토굴’, 영화로도 만들어진 이청준 소설 ‘축제’의 무대 용산면 남포마을 등을 추가한다. 다 ‘문학’하면 빼 놓을 수 없는 곳들이다.
천진한 남도의 정서가 켜켜이 쌓였다 싶을 때 고영완 가옥 찾아간다. 정원과 마당이 예쁜 옛집이다. 장흥읍 평화리 상선약수마을이다.
들머리의 못이 송백정. 소나무와 백일홍나무가 많아 송백정(松百井)이다. 바람이 나무를 조각했다. 휘어지고 굽은 나무의 모양에 눈이 호강한다. 백일홍 꽃 흐드러진 여름 풍경 그만이라는데, 신록 반영 예쁜 5월의 운치도 제법이다. 못 한쪽의 기둥들은 정자 지으려다 못 지은 흔적. 정자까지 들어앉았다면 전남 담양의 그 유명한 명옥헌 일대 버금가는 풍경 됐을 거다. 이곳에서 아름드리 나무 울창한 계단 따라 오르면 옛집이다. 가면서 계단 옆 ‘사랑나무’는 알현한다. 나무 두 그루가 사랑하는 남녀의 모습처럼 뒤엉켰는데, 이거 보면 없던 사랑도 생긴다.
고영완은 일제강점기 항일학생운동을 하고 해방 후 장흥군수와 국회의원을 지냈다. 집은 그의 할아버지가 1852년 지었다. 시간의 무게 묵직한 안채 툇마루에 앉아보고 곳간과 흙먼지 쌓인 항아리도 구경한다. 건물 사라지고 남은, 사랑채 담장의 낡은 빛깔이 어찌나 정갈한지 보고 있으면 마음까지 절로 깨끗해진다. 정원의 나무들, 여린 이파리 볕 받아 오글거린다. 꽃향기 바람 타고 콧구멍으로 흘러드니 머리까지 맑아진다. 흙은 고실하고 잔디는 싱싱한 초록. 이거 보고 느끼다보면 마음 화사해지고 비로소 봄이 봄처럼 다가온다.
고즈넉한 옛집 안마당의 정서는 이런 거다. 피곤한 발바닥뿐만 아니라 먹먹한 마음까지 어루만져주는 곳. 잊고 지낸 동경을 불쑥 게워내게 해 마음 마냥 풀어지게 만들고, 그래서 오랜만이라도 늘 ‘엄마’처럼 친근한 공간. 이러니 사는 것 헛헛하다면 이 옛집은 잊지 말고 들른다. 이런 마당 하나 가슴에 품으면 사는 데 큰 힘 된다.
안채 옆 단아한 건물은 1960년대 지은 장흥 최초의 양옥집. 고영완씨 아들 내외가 이 집에 산다.
천관산 바라보는 관산읍 방촌마을에도 옛집이 많다. 장흥 위씨 집성촌이라 대부분 이 일가의 소유다. 농촌의 평온한 봄날 풍경 만끽하며 옛집들 하나하나 찾아본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이나 여느 남도의 이름난 고택처럼 휘항찬란하지 않다. 한갓지며 사람들이 대부분 살붙이고 살아간다. 찾는 이들 편하게 맞아주는 훈훈한 인심이 또 장흥 고택의 멋이다.
방촌마을에선 존재고택, 위성룡가옥, 오헌고택이 잘 알려졌으니 이들을 중심으로 돌아본다.
존재고택에선 서재는 눈여겨본다. 대문 들어가면, 안채 앞 오른쪽 건물이다. 안마당으로 툭 튀어 나왔으니 못 찾을 수도 없다. 규모 크지 않지만 운치 있는 가람. 이곳 툇마루 앉으면 천관산 꼭대기 멋진 기암들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정말 잘 보인다. 존재 위백규(1727-1798)는 조선 후기 호남 사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가사문학작품도 많이 남겼는데, 그의 작품이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서재와 안채 모두 1900년대 초에 지어졌다.
존재고택 앞이 위성룡가옥이다. 대문 들어서면 눈이 먼저 놀란다. 요즘, 대문 앞에서부터 사방이 분홍색 꽃잔디다. 옛집과 ‘꽃융단’ 깔린 마당이 어우러지니 그야말로 그림. 꽃마당 걸으면 문학작품 속 주인공이 따로 없다. 사랑채와 안채에 딸린 정원도 참 예쁘다. 두 건물 모두 191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오헌고택은 마을 앞 대로 건너 천관산 장천재(주차장) 방향으로 가면 나온다. 대문 앞 연못이 곱게 꾸며진 집이다. 사랑채 앞 정원도 정돈 잘 돼 있다. 두 건물도 1910년대 지어졌다.
고택들 구경한 뒤 내쳐 천관산 기슭 장천재까지 가본다. 존재 선생이 후학 가르치던 건물인데 오헌고택에서 멀지 않다. 주차장에서 장천재까지 이어진 계곡길이 멋지다. 장천재 밑 이정표 따라가면 방촌마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풍호대. 마을 옆으로 서울 광화문 기준 정남쪽이 된다는 정남진 바닷가도 보인다.
○ 탐진강의 소박한 정자들
다음은 정자(亭子) 이야기. 장흥 땅 관통하는 탐진강 따라 10여개가 자리 잡았다. 이 가운데 용호정, 경호정, 동백정, 사인정은 꼭 본다. 들어앉은 자리 멋지고 깃든 사연도 흥미롭다. 상류에서부터 차례대로다.
용호정은 부산면 용반리 강변 바위 벼랑 위에 있다. 마루에 앉아 신록 화사한 숲 구경하고 발아래 흐르는 유려한 강물도 굽어본다. 정자는 최규문이란 사람이 아버지를 위해 1828년 지었다. 지금의 형태는 1947년 조금 고쳐지은 것. 사연은 이렇다. 아버지는 강 건너 할아버지 묘에 매일같이 성묘를 다녔다. 비가 많이 와 강을 건널 수 없을 때면 이 바위 벼랑에 서서 강 건너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거 안타깝게 여긴 아들이 정자 지었다. 여느 것과 달리 풍류보다 효심의 산물인 셈. 이야기 곱씹으며 그리운 사람 실컷 그리워하고, 그의 뜻과 상관없는 고운 풍경과 정자의 은밀함도 가슴에 담는다.
경호정은 부산면 기동리에 있다. 장흥위씨 문중에서 관리하는 정자인데 제법 널찍하고 탐진강도 잘 보인다. 정자 아래 강변에 250년 수령의 왕버드나무가 멋지다.
동백정은 장동면 만년리에 있다. 탐진강 지류인 금자천 따라가면, 물길 건너 빼곡한 소나무, 동백나무 사이로 단아한 정자 하나 모습 드러낸다. 조선 세조 때 좌찬성을 지낸 김린이 1458년 임시로 지은 정사를 후손이 1588년에 고쳐짓고 이후 1980년대 들어 한번 더 고쳐지었다. 그는 단종 폐위 후 정치적 혼란기에 모함을 받아 장흥부사로 좌천됐다가 스스로 은퇴하고 이곳에 은거했다. 나무들은 그가 그토록 좋아한 것들이다. 물길 건너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멋지고 정자 마루에 앉아 담장 너머 보는 풍경도 운치가 있다. 숲에 의자도 만들어 뒀으니 산책하고, 또 머물며 급할 것 없는 봄날 오후를 즐겨본다.
사인정은 장흥읍 송암리에 있다. 아늑한 이 작은 정자에 사연 참 여럿 깃들었다. 정자는 조선 초기 이조참판을 지낸 김필이 역시 단종 폐위 후 어지러운 세상을 한탄하며 벼슬 버리고 낙향해 은둔했던 정자다. 그는 정자에 머물며 단종이 묻힌 북쪽을 향해 하루 네 번 절을 하고 정자 뒤 바위에 단종의 얼굴까지 그려 넣었다고 전한다. 정자 기둥에 걸린, 세종이 하사했다는 금색 주련도 살피고 백범 김구가 중국 상하이 망명길에 하룻밤 묵어가며 새겼다는 ‘제일강산’이란 글씨도 구경한다.
장흥의 옛집과 정자들의 여운이 참 은근하다. 생각해보면, 잊었다 싶었는데 어느 순간 불쑥 되살아나 미소 짓게 만드는 것은 여운 오래 가는 것들이다. 이러니 장흥의 어느 옛집과 탐진강 어느 정자든 찾아들기만 하면 본전 이상 가져가는 거다.
○ 여행메모
△ 고영완가옥과 방촌마을에 비해 탐진강 정자들 찾아가기 쉽지 않다. 군청 등에 연락해 주소를 확인한 후 내비게이션에 주소검색을 이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장흥군청 문화관광과 (061)860-0337
△ 먹거리: ‘장흥삼합’이 유명하다. 한우, 표고버섯, 키조개를 함께 먹는다. 군청 관계자에 따르면 장흥은 쇠고기가 여느 지역에 비해 싼 편이다. 장흥 인구가 4만2,000여명인데 장흥 땅의 소는 6만~7만두다. 표고버섯은 전국 제일 생산량을 자랑한다. 기름진 득량만에서 나는 키조개는 10여년 전만해도 전량 일본으로 수출될 만큼 맛과 품질 뛰어나다. 장흥읍 탐진강변, 정남진 토요시장 일대 정육식당들이 대부분 장흥삼합 판매한다. 이 가운데 정남진 만나숯불갈비(061-864-1818)는 숯불을 사용해 인기다. 꽃등심 7,000원, 갈비살 8,000원, 살치살 1만1,700원(각 국내산 한우 1+, 100g 기준), 상차림비 3,000원(1인), 표고버섯ㆍ키조개 한접시 1만2,000원이다.
장흥읍 건산리 싱싱회마을(061-863-8555)에서는 갑오징어 먹물을 이용한 갑오징어먹물찜을 먹을 수 있다. 고소한 맛이 일품. 4만원. 이곳 된장물회도 유명하다. 2만5,000원(소), 3만5,000원(대)이다.
장흥읍 시루와 콩(061-863-5553)은 전통손두부집이다. 쫄깃한 면발, 고소한 국물 맛 일품인 쑥면콩국수 6,000원, 모두부 5,000원, 두부와 수육 1만7,000원이다.
염산을 쓰지 않은 무산김, 낙지 등도 장흥 특산물이다.
△ 잠잘 곳: 장흥에 휴양림이 많다. 유치면의 유치자연휴양림에는 편백나무로 만들어진 숙소가 있다. 천관산자연휴양림은 약 7km 나 산길을 들어가야 하지만 이곳은 큰 길에서 가까워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다. 장흥읍 우드랜드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캠핑장도 있고 등산로와 산책로도 조성돼 있다. 홈페이지 통해 예약 가능하다. 유치자연휴양림 (061)863-6350, www.yuchi.or.kr
장흥=글ㆍ사진 김성환기자 spam001@hksp.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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