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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리그

입력
2014.05.12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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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애인을 죽였다. 이후 증인을 없애려고 사고를 위장했지만, 제거에 실패하자 병실로 찾아가 호흡기를 뗀다. 이 정도 자극에 별 반응 없을 것 같은 이들을 위한 새로운 메뉴도 있다. 사고로 누운 아들에게 심장이 필요하다. 재벌 총수인 아버지는 멀쩡한 청년을 과거에 버린 아들로 둔갑시켜 심장을 빼낼 궁리를 하는데… 들키기 전까지 악을 덮기 위한 극악은 계속되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만행에 길들여지다가 ‘그들이 사는 세상은 꿈도 꾸면 안 될 성역’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상류사회 진입성공은 출생의 비밀에 묻힌 고귀한 혈통을 가졌기에 두드러졌던 자들 몫이다. 드라마적 신데렐라 로망조차 극히 드물게 그들이 적선한 선택에 기대야만 이루어진다. 결국, 쫓겨나는 신데렐라가 차라리 현실적이라 가르쳐 주기도 한다. 이렇게 글로 옮겨놓으니 딱 3류 찌라시다. 혹자는 “세상 다 그렇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년간 매일 아침저녁으로 내 집 마루에서 본다면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엉켜버리지 않겠나.

형식도, 출연자도 다른 버라이어티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나만 아니면 돼.” 그리고 비열한 속임수와 거짓말로 이기는 과정을 ‘예능적 재미’로 합리화한다는 것. 이어서 시청자들이 구경하며 희희낙락하는 승자에게 감정이입 하게 유도함으로써 패자한테 가하는 벌칙을 유희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가족이 모여 앉을 주말 오후, 우리는 매체가 반복해 생산하는 고통에 그렇게 익숙해지고 ‘남’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서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잃어버린다.

끝내 발표된 것만으로도 2시간여, 손만 뻗으면 살릴 수 있는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뒷짐지고 구경하는 일이 벌어졌다. 단 한 명도 구하지 않고 한 달을 보내며 300여명을 수장시킨 학살 극. 악몽 같은 시간을 지나 피붙이를 망망대해에 잃고 가슴에 한으로 묻어야 하는 이도 있을 게다. 어쩌면 아직도 그 배에 탄 줄 모르는 누군가의 집을 나갔던 아들 혹은 딸이 부모를 그리며 물살에 쓸려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성난 민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당당한 자본과 권력, 이들의 개가 된 언론이 수수방관한 죽음에 던지는 ‘공감하지 못하는 자들’의 망언을 보며 집단최면의 무서움을 실감한다. 진검을 쥔 고수가 천한 백성 앞에 얼굴을 내놓을 리 없으니 대놓고 발언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언젠가 폐기될 것을 모르고 정승 집에 살기 때문에 상위 1%라 착각하는 머슴일 수도 있겠다.

권력의 테러로부터 안전한 계층이라서? 아니, ‘그들만의 리그’에서는 상식인 것 같다. “비슷한 사건 일어나도 이성적으로 대응하는 다른 국가 사례랑 달리… 국민 정서가 미개한데….”

적어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중 비슷한 사건이 일어나면 국민의 죽음을 방관하는 나라는 없다는 것도 생각할 이유가 없는 도련님답게 자신과 타인을 완벽히 갈라놓는다. 자, 이쯤 되면 “이 나라에서는 장관이나 국회의원 정도는 돼야 자식 지킬 수 있어요”라는 절규가 맞는 말이 된다. 노예 놈 자식이 빠졌다고 주인이 물에 뛰어들어 구하는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규정이 ‘폭력성, 잔혹성 등이 심각한 정보, 생명을 경시하는 내용,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구체적으로 표현해 혐오감을 주는 내용’이 심의대상이라고 명문화는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본과 권력비호를 위한 노역을 정체성으로 한다. 어차피 ‘나 아닌 남’의 고통에 공감해봐야 얻어먹을 것이 없으니 국민의 의지를 무력화하고 정신이 병들도록 책동하며 기득권에 기생하는 것이다.

드라마는 계급주의를 부추겼고 예능은 이기주의를 선동했다. 그리고 우리는 벗과 후배들이 유린당하도록 방치해 부끄러운 죄인이 되었다. 이렇게 수년간 시계를 거꾸로 돌렸기에 지금 치러야 하는 죗값은 비싸고 갚아야 할 빚은 무겁다.

“자식의 죽음 앞에 절제하는 모습을 대할 때 죽음은 더 숭고해지고 감동은 깊어진다.” 언론인이라는 자가 모 일간지에 발표한 참극(慘劇) ‘감상문’이다. 비루한 인생이여, 당신에게는 동정도 사치다.

김신아 아트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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