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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산 없는 '차별의 링'… 고독한 흑인, 불의를 KO 시키다

입력
2014.05.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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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빈 카터
루빈 카터

덴젤 워싱턴이 열연한 영화 ‘허리케인’(노먼 주이슨 감독, 1999년)의 실제 주인공 루빈 카터(Rubin Carter)가 지난 달 20일 캐나다 토론토의 자택에서 지병으로 숨졌다. 향년 76세.

고인은 살인 누명과 두 차례의 종신형, 19년간의 옥살이 끝에 자신의 결백을 입증했고, 자신처럼 억울한 수감자를 돕는 데 여행을 바쳤다. 그는 ‘허리케인’ 같은 주먹을 지닌 미들급 복서였으나 그의 투지는 링에서보다 감옥과 법정에서 더 빛났다. 그의 상대는 백인 주류사회의 흑인에 대한편견과 차별과 불의였고, 시도 때도 없이 엄습하던 절망의 아늑한 유혹이었다. 영화에서 그려진 것처럼 선량한 시민이 아니었고 마틴 루터 킹이나 말콤 엑스처럼 화려한 영웅도 아니었지만, 그는 누구보다 인간적인 흑인 인권의 챔프였다.

1966년 6월 17일 새벽 미국 뉴저지의 한 레스토랑에서 백인 세 명이 총격으로 피살된다. 범인은 두 명의 흑인. 목격자들은 범인들이 흰색 다지(DODGE)를 타고 도주했다고 진술했다. 그날 카터는 친구 아티스와 범행 현장 인근에서 술을 마셨고, 그의 차가 흰색 다지였다.

카터는 사건 당일 검문에 걸려 간단한 조사를 받고 풀려나지만 곧 살인 혐의로 기소된다. 다른 범행을 위해 사건 현장 주변에 있던 두 백인 전과자가 카터 일행이 범행 후 도주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진술한 거였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작은 키(5’11’’, 약 156㎝)였다는 또 다른 목격담도, 카터의 차 뒷좌석에서 발견된 32구경 스미스앤드웨슨 납탄이 범행에 사용된 구리탄과 다르다는 점도 무시됐다. 카터는 173㎝의 건장한 체구였고, 납탄은 당시 경찰이 주로 쓰던 총알이었다.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유죄를 평결했고, 29살의 카터는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1937년 5월 뉴저지 복동부 클립턴에서 7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9살 때 가게에서 옷을 훔쳐 교정학교에 들어가야 했고, 11살에는,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을 성추행하고 위협한 남자를 칼로 찔러 소년원에 갇힌다. 17살이던 54년 입대해 서독에서 2년간 군 복무하고 거기서 권투를 익힌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 강도 상해 혐의로 4년 형을 살고 61년 5월 출옥한 뒤 프로 권투선수로 데뷔한다.

카터는 거칠고 반항적이고 또 위험한 복서였다. 63년 체급을 올린 웰트급 챔피언 에밀리 그리피스와 맞붙어 다수의 예상을 뒤엎고 1라운드에 2차례 다운시키며 TKO승을 거둔다. 빠르고 강한 레프트 훅을 주무기로 주로 초반에 승부를 냈고, 그 덕에 그는 ‘허리케인’이란 닉네임을 얻는다. 64년 챔피언 조이 지아델로와의 시합에서도 초반 4라운드까지는 압도하지만, 그의 주먹을 버틴 챔프에게 판정패 한다.(훗날 영화는 편파 판정으로 패배한 것처럼 묘사, 지아델로 측으로부터 소송을 당한다.) 사건이 나던 때만 해도 카터는 재도전의 기회를 노리던 중이었다. 복서로서의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의 전적은 40전 27승 19KO였다. 93년 카터는 WBC 명예 챔피언 벨트를 받는다.

카터가 치른 차별과의 싸움은 복싱과 달랐고 그의 스타일과도 달랐다. 1대1의 “정직한” 복싱과 달리 그 싸움은 처음부터 편파적이었고 또 지저분했다. 그리고 아주 길고도 지루했다.

그는 교정복을 입는 데서부터 노역 등 거의 모든 강제적 수감 프로그램에 저항했고, 심지어 운동장에서의 휴식조차 거부한다. 대신 징벌방을 오갔다. 영국의 인권변호사그룹 도티스트릿챔버의 설립자로 당시엔 젊은 변호사였던 조프레이 로버트슨은 카터가 “(감옥의 규칙을)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 남들이 당신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 결정하는 것은 당신 자신이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NYT, 2014.4.20) 옥에서 카터는 다양한 책을 읽었고, 인권단체와 시민운동가 등에게 줄기차게 편지를 써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한다. 그의 결연한 태도는 수감자들에게도 인기를 얻어, 71년 감옥 폭동 때는 교도관의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옥중 자서전 라운드(The sixteenth Round)(1975년)는 그의 석방운동을 점화하는 기폭제가 됐고, 이듬해인 76년 뉴저지 법원은 재심을 결정한다.

법원의 결정에는 지역 공익변호사회와 한 프리랜서 기자의 노력이 주효했다. 그들은 검찰의 증거 조작 혐의와 백인 증인들의 위증 자백을 법원에 제출했다. 증인들은 검찰이 ‘범인’을 알려주면 조기 가석방과 1만 달러(NYT, 가디언은 1만2,000달러)의 사례금을 약속했다고 자백했다.

보석으로 풀려난 카터는 하지만 9개월 뒤 재판에서 다시 종신형을 선고 받고 투옥된다. 증인들이 법정에서 자신의 위증 자백을 다시 번복한 거였다. 또 검찰은 1심에서는 거론하지 않았던 카터의 범행 동기, 즉 백인 증오 범죄라는 정황 증거들을 제시하며 배심원단을 설득했다. 66년 사건 직전 카터와 잘 알던 흑인 레스토랑 주인이 백인에 의해 피살된 점, 64년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카터가 킹 목사의 비폭력주의를 비판한 점 등이 근거였다. 재심 배심원단에는 흑인도 2명 포함돼 있었다.

카터가 재수감되면서 그를 돕던 무하마드 알리 등 명망가들도 대부분도 그의 곁을 떠난다. 하지만 카터의 전의는 꺾이지 않았다. 평결 직후 NYT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내 육신은 가둘 수 있지만 내 마음을 구속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1985년 연방법원의 최종적인 무죄 판결을 얻어낼 때까지, 그의 저항은 계속된다.

두 차례의 믿기지 않는 종신형 판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60년대 미국 사회 분위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백인사회는 흑인사회의 거센 집단적 저항에 직면해 있었다. 킹 목사가 미국 노예해방 100주년을 맞아 워싱턴 평화대행진을 이끌며 링컨기념관 대리석 계단에서 평화와 흑백 화합의 꿈을 연설한 게 1963년이었다. 하지만 3년 뒤 뉴욕의 흑인 슬럼가 와츠에서 대규모 흑인 폭동이 일어난다. 백인 경찰관의 흑인에 대한 부당한 폭행 소문으로 촉발된 이 6일간의 폭동은 34명의 사망자와 1,000여 명의 부상자를 낳는다. 말콤 엑스의 강경투쟁 노선을 추종하는 급진적 흑인운동단체 ‘블랙 팬서(Black Panthers)가 결성된 것도 65년이었고, 흑인 자결권과 정치적 세력화를 주장한 ‘블랙 파워’ 운동이 절정을 맞은 것도 그 즈음서부터였다. 스타 복서에다 흑백 갈등의 상징이 돼버린 카터를 범죄자로 만드는 것은 백인 사회의 심리적 마지노선이었다.

재심 판결 전까지 가수 밥 딜런은 카터의 든든한 우군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카터의 사연을 담은 노래 ‘The Hurricane’(75년 발표, 76년 앨범 ‘Desire’에 수록)을 발표했고,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과 휴스턴 아스트로돔에서 후원금 마련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밥 딜런으로서는 카터의 사연이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64년 ‘해티 캐롤의 외로운 죽음(The Lonesome Death of Hattie Carrol)’이란 노래를 만들어 부른 적이 있었다. 볼티모어의 한 호텔 흑인 청소부였던 해티 캐롤(당시 51세)은 1963년 2월 새벽 만취한 24세 백인 남자의 이유 없는 폭행으로 숨졌다. 캐롤은 10남매의 가난한 어머니였고, 범인은 백만장자 지역 유지의 아들이었다. 경찰에서도 폭언과 모욕으로 일관하던 범인은 당일 보석으로 풀려났고, 6개월 뒤 법원은 그에게 징역 6개월 형을 선고한다. 카터의 시대는 캐롤의 시대보다 조금 나아졌을지 모르지만, ‘선량한 어머니’ 캐롤과 달리 그는 전과자였다. 그는 재심을 위한 9개월간의 보석 기간 동안 자신을 돕던 자원봉사자 여성과 바람을 피우다 폭행사건을 일으켰고, 재투옥 직후 아내와 이혼하기도 했다. 알리와 밥 딜런이 카터를 외면한 데는 그의 그런 행실 탓도 컸을 것이다. 그리고, 전과자에 대한 세상의 편견은 더 컸을 것이다.

85년 미 연방법원의 무죄 평결을 이끌어내기까지 9년간 카터를 도운 것은 공익변호사 마이런 벨도크와 캐나다의 한 자치공동체였다. 벨도크는 검찰이 숨긴 증거들과 증인에 대한 거짓말탐지기 조사 결과 등을 근거로 구속적부심을 위한 인신보호를 청구했고, 연방법원은 뉴저지 법원의 판결이 “이성이 아닌 인종주의에, 공개가 아닌 은폐에 근거한 판결이었다”며 벨도크의 손을 들어준다. 그해 11월, 48세의 카터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고, 뉴지저 주검찰은 3년 뒤인 1988년 카터에 대한 항소나 추가 기소를 최종적으로 포기한다. 벨도크는 “진짜 이야기는, 정의가 악을 이긴다는 게 아니라 그게 정말 힘겨운 싸움이라는 것” 이라며 “성서이야기 수준의 박해와 처벌과 보상의 시놉시스가 거기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제임스 허시 저 )

자유인 카터는 캐나다로 이주, 자신과 유사한 처지의 수형자를 법률적으로 돕는 ‘오심변호협회(’AIDWYC, Association in Defence of the Wrongly Convicted)의 창립멤버로 참여해 상임이사(1993~2004)로 일했다. AIDWYC는 지금까지 18명의 무고한 수형자를 석방시켰다. 카터는 2004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독자적인 조직(Innocence International)을 만들어 자신만의 활동을 이어갔다. 열정적인 인권 강연자로, 또 사형 반대 운동가로 다수의 명예 법학학위와 영예로운 상을 탔다.

1999년 영화 ‘허리케인’은 감동적인 작품이지만, 서사의 극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고 또 사실을 단순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카터가 11살 때 저지른 범죄 담당 형사가 66년 사건의 담당 형사였다는 점 등을 근거로 영화는 카터와 그를 장발장과 자베르의 악연으로 대립시켰다. 즉 구조적 문제를 사적 원한관계로 단순화했다. 또 카터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 적지 않은 생애의 오점들을 미화하거나 표백했다.

영화는 또 한 사람의 숨은 영웅, 존 아티스를 엑스트라로 밀쳐냈다. 66년 사건 당시 22살의 ‘공범’이었던 아티스는 검찰의 양형거래(Plea Bargaining) 유혹과 전기의자의 협박 사이에서 흔들림 없이 친구의 곁 진실과 정의의 곁을 지켰다. 그는 1981년 가석방으로 풀려난 뒤로도 임시직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가며 카터의 무죄 석방운동에 앞장섰다. 수감 중 불치병인 버거병(buerger’s disease, 폐색성 혈전 혈관염)을 얻은 그는, 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발가락 5개의 일부와 손가락 2개를 절단해야 했고, 통증을 이기기 위해 코카인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고 88년 1월 NYT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85년 11월 8일 법정을 나선 카터가 가장 먼저 포옹한 것도 아티스였고, 숨을 거두던 날 그의 곁을 지킨 것도 아티스였다.

카터는 2011년 또 한 권의 책 (2011)을 썼고, 그 해부터 전립선암 투병을 시작했다. 지난 2월 21일 그는 ‘더 데일리 뉴스’에 ‘허리케인 카터의 마지막 소원(Hurricane Carter’s Dying Wish)’라는 제목의 기고를 싣는다. 85년 살인혐의로 투옥된 한 청년에 대한 재심을 촉구하는 그 글에서 카터는 “이 행성에서 보낸 나의 생애 가운데 첫 49년은 지옥이었지만, 나머지 28년은 천국이었다.(…) 진실이 중요한 세상, 늦더라도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이라면 그 곳이 바로 우리 모두의 천국일 것이다”라고 썼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정의 위해 싸우는 변호사들 ; 1992년 설립된 美 결백프로젝트, 300여명 결백 밝혀내…한국엔 재단법인 '진실의 힘' 활동]

존 그리샴의 논픽션 이노센트 맨은 살인 피의자로 35살에 사형 선고를 받고 12년간 복역한 뒤 무죄 석방된 론 윌리엄슨(1953~2004)이란 남자의 이야기다. 강압 수사와 허위 자백, 정황증거와 위증, 형식적인 국선변호로 점철된 수사와 재판. 상소도 모두 기각됐다. 그의 결백을 밝힌 것은 뉴욕의 ‘결백 프로젝트(Innocence Project)’ 소속 변호사들로 그들은 론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헌법상 권리를 침해 당했다며 연방법원에 재심을 청구, DNA검사를 통해 그의 결백을 입증했다. 99년 석방된 론은 요양소를 전전하다 5년 뒤 간경변으로 숨졌다. 론은 한 글에서 자신은 죽어 천국도 지옥도 가기 싫다고, “더 이상 심판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썼다.

결백 프로젝트는 뉴욕 예시바 대학 카르도조 로스쿨의 법률클리닉으로, 유전자 감식을 통해 무죄입증이 가능한 수형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1992년에 처음 설립돼 지금까지 300여명의 결백을 밝혀냈다. 그 중 18명이 사형수였다.

한국에는 ‘재단법인 진실의 힘’이 있다. 군사정부 시절 고문과 불공정한 재판으로 조작된 ‘간첩’ 피해자들이 손해배상금의 일부를 출연해 만든 법인이다. 고문 등 국가폭력과 조작사건의 진상 규명 등에 주력하며 최근에는 용산 참사, 유서대필사건의 강기훈씨 재판 등을 지원했다. 공익변호사들이 있지만, 아직 가난한 수형자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포괄적으로 힘을 쏟지는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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