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 넘게 ‘시극운동’을 해왔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게 묻는다. “당신이 하는 시극운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고. 대학로 소극장과 홍대의 작은 클럽까지 꾸준히 작업을 해왔다. 지난해에는 나비잠(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이라는 극을 통해 잃어버린 모성을 되살리고 잊힌 우리의 자장가들을 시극으로 복원해 보고자 했다. 시극운동은 모국어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된 운동이기도 하다. 지금은 권위와 질서를 상징하는 부성(父性)의 시대다. 나는 말(言)을 다루면서 모성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국어와 모국어는 다르다. 국어가 말을 구획화한 것이라면 모국어는 내가 부정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예를 들어 자장가나 태담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시극은 침묵의 질을 표현하는 극운동이다. 시는 말할 수 있는 것 보다 말하지 못하는 부분을 쓰는 것이다. 시극이란 상징, 사이 같은 시의 속성이 살아있는 극이다. 스토리와 속도의 위장에 질식되어가는 극의 흐름에서 시극은 이야기의 목적성보다 이야기의 가능성을 찾는다. 무엇보다 언어가 인간 속에 살아있는 드라마를 지향한다.
예술은 타자와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가려진, 이 세계가 가지고 있는 다른 진실 혹은 다른 차원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시극은 스타강사들의 처방전 특강처럼 답을 주지 않는다. 시극은 우리의 마음에서 움직이고 있던 오래된 감정의 자연을 발견할 수 있는 생태계이다. 침묵은 시극에 숨어 사는 이끼들이다. 시집 속엔 시인이 넣지도 않은 귀뚜라미가 들어가 울고 있기도 하고 시극 속엔 연출과 작가가 의도하지 않은 보아 뱀이나 코끼리가 무대에 나와 어슬렁거리거나 어른거리기도 한다. 시와 연극은 내게 쌍생아처럼 한 몸이라는 말을 자주 해왔다. 그건 시와 시극의 차이보다 공존지를 설명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시극을 살리는 일은 내게 시운동과 극운동의 더부살이 같은 것이다.
시가 언어의 밀도에 집중하는 방식이라면, 시극은 시적인 언어로 만나는 공간과의 호흡의 문제에 집중하는 것이다. 시는 언어로 언어를 비우는 일이지만, 시극은 언어로 빈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시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시극은 내 중요한 문학적 관심 중 하나였다. 내 작품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독자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시극은 생소한 장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똑같은 희곡인데 시적 드라마가 있는 무대화이다. 시극은 연극의 대사가 시의 형태로 쓰인 희곡을 말한다. 포에틱 뮤지컬(poetic musical)로 봐도 무방하다. 산문적 흐름이지만 중심이 되는 것은 라임과 운문이다. T.S. 엘리엇의 캣츠도 시극이었다. 열두 마리의 고양이에 대한 시집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 이야기가 처음에는 시극으로 상연되었고 후에 브로드웨이의 손을 거쳐서 뮤지컬이 된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극들도 무훈 시라고 불리는 시극에서 태동을 찾는다. 요즘에는 시극을 마치 실험의 한 부분인 것처럼 취급해 버리지만, 시극을 통해 침묵이 살아있는 질을 만드는 작업들은 오히려 시와 연극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촘촘한 스토리텔링이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시극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현상은 안타깝다. 친절하게 모든 이야기들을 채워 넣어주는 이야기들에 밀려 무대를 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차원에서 연극 무대가 균형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시적인 연극에 대한 갈증을 포기할 수 없다. 자장가가 인류의 가장 원형적인 노래라고 할 수 있듯이. 시극은 인간의 무의식으로 들어가는 라임이다. 시극은 그 모성의 언어를 찾아가는 리듬을 포기하지 않는 작업이다. 시극은 멸종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는 시인은 참 많지만, 정말 심각할 정도로 시심을 잃어가고 있다.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시가 마치 사치나 감정의 산물처럼 노출되고 있기도 하다. 우리 언어의 속살이 살아있는 극도 있어야 한다. 시적인 침묵과 행간이 무대에 올라가는 것에 대한 짝사랑은 계속 될 것이다.
김경주 시인,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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