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재앙이 닥치면 감정도 요동친다. 광주항쟁이 벌어졌던 그 해 초여름, 고향에선 큰 홍수가 났다. 검은 하늘이 무너져 내린 듯 갑자기 폭우가 내리 붓더니 잔뜩 부풀어 오른 격류에 못 이겨 읍을 에둘렀던 둑 곳곳이 터졌다. 그리고 삽시간에 엄청난 홍수가 읍 전체를 휩쓸었던 것이다.
군병력까지 투입됐으나 시신 찾고 큰 길 정리하기 바빴다. 진흙이 무릎까지 들어찬 주택 복구는 온전히 수재민들의 몫이었다. 간장, 고추장 단지까지 다 떠내려 간 아수라장에서 얼이 반쯤 나간 상태로 양동이에 진흙을 퍼 담아 골목으로 내치던 이웃끼리 고성이 터지곤 했다. “뉘 집 진흙을 왜 남의 집 앞에 퍼질러 놓는 겨!”하면, “지랄이다. 달리 내칠 데가 어디 있다고 억지소리여!”하며 물어뜯을 듯이 눈을 부라렸다. 오랫동안 형님, 아우하며 지낸 분들이 그렇게 눈에 핏발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도 재앙 앞에 쓰러지지 않으려는 안간힘이었을 거라고, 나중에 짐작했다.
세월호 침몰 참사로 인한 ‘집단적 트라우마’로 이번엔 전 국민의 감정이 유례 없이 격앙된 상태다. 격앙된 정서는 수많은 어린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와 유족들을 향한 애잔한 연민의 눈물로 흐르다가도, 순식간에 들끓는 분노로 표출되기도 한다.
선장과 선원, 선사의 어리석음에 치를 떨었던 마음은 무책임하고 무능한 정부에 대한 야유로 터져 총리에게 물세례를 날리기도 했다. 분노의 폭풍 속에 유가족들 사이에서 하릴없이 컵라면을 축내던 허우대 멀쩡한 장관은 ‘죽일 놈’이 된지 오래고, 술자리 폭탄주에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누구 손에 거꾸러질지 모르게 됐다. 하지만 이 집단적 분노와 원망 역시, 너무 참담한 비극을 버텨내려는 무의식적 안간힘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본다.
참으로 안 된 건 공연히 분노와 원망을 부추기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일각의 무분별한 준동이다. 책임 있는 어른이라면, 지금은 상처를 달래고 원망과 분노를 다스려 갈갈이 찢긴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할 때다. 하지만 과거 정부에서 정무직 공무원을 역임한 한 인사는 “대통령이기를 포기한 듯한 대통령”이니, “국민의 마음 속에서 이미 ‘끝난’ 인물”이니 하는 표현까지 써 가며 온통 대통령 깎아 내리는 주장을 공론이랍시고 내놨다. 한 때 동양학자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다른 인물은 더 나아가 “국민들이여! 분노하라! 거리로 뛰쳐나와라!”라는 식의 격문을 내돌렸다. 그는 “세월호 참변의 전 과정을 직접적으로 총괄한 사람은 박근혜 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며 대통령 하야를 거론하기도 했다.
대통령에게 면책부를 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대통령이기를 포기한 듯한 적도 없으며, ‘참변 과정을 직접 총괄할 수밖에 없다’는 교언(巧言)도 온당치 않다. 개탄스러운 건 이런 신파조의 격론이 정당 및 사회단체 등의 신중한 처신의 여지를 좁혀 공허한 정쟁과 갈등의 확대재생산 구조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남의 나라 예를 들어 안 됐지만, 과거 미국 9ㆍ11 테러나 동일본 대지진 때, 그곳의 지도자급 인사들이 제 나라의 대통령과 총리를 이토록 무례하게 야유하고, 흔들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없다.
사실 세월호 참사에 작용한 정부의 실책은 궁극적으로 박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일이지만, 또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다. 일례로 모두들 안전불감증을 개탄하지만, 우리 국민은 3년 전 여름 정치권의 교언에 넘어가 무상급식을 취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수많은 학교의 위험 교실을 지금껏 방치하게 한 비합리적 선택의 당사자들이다.
국민이 거리로 뛰쳐나오고, 대통령이 하야 한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원칙과 기본이 하루 아침에 바로 설 수는 없다. 세월호 참사는 대통령의 각성뿐 아니라, 안전 인프라 구축을 위한 예산 집행 우선 순위의 재조정이나 관료개혁 같은 구체적인 국가과제를 던져줬다. 지금 우리 국민은 지난 과오를 냉정하게 자성하고, 정치권이 고질적 정쟁을 넘어 향후 국정조사 등을 통해 국가개조의 틀을 내놓을 수 있도록 엄중하게 뜻을 모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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