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이다. 엄마에게서 부재 중 전화가 와 있었다. 전화를 넣었지만 통화 중이라 잠시 후 다시 번호를 눌렀는데, 신호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목소리가 건너왔다. “괜찮니?” 무슨 소리인가 싶어 영문을 물으니 상왕십리역에 큰 사고가 났다고 했다. 근심이 돼서 서울 사는 가족과 지인 몇에게 전화를 돌리는 중이라고. 아까 통화 중이었던 것도 그 때문인 모양이었다. 그 열차에 타지 않았으니 무사하다고, 침착하게 전하고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무사하다는 말을 태연하게 하는 이 차분함은 뭘까. 다른 때 같았다면 이렇게 대꾸했을 것이다. ‘걱정도 팔자셔. 서울이 뭐 손바닥인가?’ 아니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잖아. 사고 당했으면 이쪽에서 먼저 연락 가거든요?’ 엄마는 멋쩍게 웃으며 나의 퉁명스러움을 받아넘겼겠지. 아니, 다른 때 같았으면 전화를 걸어오지도 않으셨을 거다. 걱정을 사서 하시는 편은 아니니까. 그런데 엄마는 평소의 엄마답지 않게 뉴스 속보에 초조해졌고, 나는 평소의 나답지 않게 그 염려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엄마의 예외 상태이고 나의 예외 상태인 걸까. 어쩌면 4월 16일 이후로, 언제 닥칠지 모를 위험에 대한 반응 수위가 이렇게 조절되어 일상에 스며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속담이 이제 통하지 않는다. 솥뚜껑으로 알려진 것이 정말 솥뚜껑에 불과한지 늘 예의주시해야 한다. 피로가 밀려온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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