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인 김태경씨가 4월 14일 별세했다. 향년 60세. 고인은 길지 않은 생을 거침없이 살았고, 구애 없는 분방함과 고집으로 삶과 일에서 드문 멋을 누리고 또 이루었다. 그는 빚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더 큰 빚을 세상에 지우고 떠났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와 좋은 책들을 남겼다.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1975년. 2학기에 접어든 문리대 2학년 생들이 전공을 나누고 새로 생긴 인문대 사회대 등 단과대별로 흩어져 우왕좌왕하던 시기였다. 시급한 현안 중 하나가 문리대 학보(‘형성’)를 대체할 단과대 학보를 만드는 거였다고 한다. 학도호국단(총학생회 전신)은 지원을 일절 거부하던 학교와 싸워 간신히 편집실을 확보했다.
미학과 김태경(74학번)씨에게 그 공간은 특별한 판촉 영업공간이기도 했다. 그의 상품은 원서를 복사한 해적판으로, 당시 대학생들로선 제목만 들어도 새파랗게 질릴 금서들이었다. “국가와 안전)라는 책도 기억나요. 레닌 저서 국가와 혁명)의 제목만 바꾼 거였죠.” 시인 김사인(국문 74학번, 동덕여대 교수) 씨는 “이미 그 때부터 태경이는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고 말했다. 기껏해야 페다고지(파울로 프레이리의 교육서) 등 미국 뉴레프트 계열의 책들을 간신히 찾아 읽던 시절, 고인의 책들은 은밀하고 치명적인 지적 유혹이었다. “루카치는 마음만 먹으면 전집도 갖출 수 있을 정도였고, 칼 카우츠키, 모리스 돕, 폴 스위지…, 없는 게 없었어요. 그 시절에 그것들을 어디서 어떻게 구하고 복사하고 제본했는지 지금까지 아무도 몰라요. 물어볼 수 있는 때도 아니었죠.” 다만 당시 아무에게나 없던 배짱과 열정이 그에게 있었고, 그럼으로써 종로 일대의 헌책방과 외서 수입상 등과 특별한 끈을 만들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임영일(사회학 74학번) 한국노동운동연구소장은 “진흥문화사라고 서대문 쪽에서 영인본 복사판을 취급하던 데와 몰래 거래하는 눈치였다”고 말했다.
레닌 저서처럼 위험한 책은 표지와 제목을 바꿨고, 어떤 건 컬러 표지로 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 시절서부터 고인은 책의 모양새까지 신경 썼던 셈이다. 김사인 씨는 “많진 않았지만 이윤도 얹어 팔았어요. 엄연한 장사였죠. 그때부터 태경이는 책 장사 할 거라는 말을 하곤 했어요”라 말했다. 고인은 4학년 말이던 77년 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돼 22개월 옥살이를 하지만, 거기 금서 제작 배포 혐의는 얹히지 않았다. 경찰들도 압수한 책들이 어떤 책인지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 ‘전력’은 81년 고인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될 때 병합 심리된다.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지만 고인의 첫 출판사는 80년 하반기에 차렸다가 금세 문 닫은 지청사였다. 대학 4학년 무렵 인문ㆍ사회대생 스무남은 명이 만든 모임이 있었고, 그 이름이 자그마치 ‘지하청년사회당’이었다고 한다. “구체적인 목적 없이 그냥 뭔가 하자는 생각, 졸업 이후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뭔가 해보려면 조직적 단위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출판사 이름은 아마 거기서 따온 걸 겁니다.”(임영일 소장)
77년 구속의 빌미가 되는 학내 유인물 배포 모의도 논의만 하다가 접기로 한 거였는데, 형사들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일어난 사단이었다. 고인은 79년 출옥하자마자 서울 광화문에 있던 ‘민중문화사’ 일을 시작한다. 고인이 직접 경영했다는 이도 있고, 동업이었다는 이도 있지만, 임영일 소장은 일종의 매니저로 고용된 거였다고 말했다. “60년대 말 ‘고려대 검은시월단 사건’이라고 있었어요. 일종의 운동권 모임이었는데 뚜렷한 활동 없이 덜미가 잡혀 여럿 구속됐죠. 그 중 한 명이 사학과(69학번, 미국 거주) 정진영씨였고, 졸업 후 그가 운영하던 게 민중문화사였어요. 태경이가 그와 친분이 있었던가 봐요.” 민중문화사는 고인이 가담하면서 국내 최초 사회과학 전문 서점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해졌고, ‘귀한’ 책을 찾는 교수와 학생들이 “민중문화사에 없으면 한국에 없는 책”이라는 믿음으로 전국에서 찾아오는 곳이 됐다. 물론 고인의 해적판 금서 판매는, 서가 뒤편에서 이어졌다.
전 법무부장관 강금실(법무법인 원 고문변호사)씨가 고인을 만난 건 그 무렵이었고, 고인이 다시 수배돼 도피 생활을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80년 5월 17일이었어요. 저녁 TV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방영되던 중이었는데 불쑥 자막이 뜨더군요. ‘비상계엄령 선포’. 그 사람은 그 길로 도망을 쳤어요.” 고인은 이듬해 8월 체포될 때까지 15개월 동안 숨어 살며 번역 등으로 돈을 벌어 가족 생활비를 댔고, 경기 안양에 18평 전세 아파트까지 마련했다고 한다. “안양 아파트에서 친구들이 모여 노는데 형사들이 들이닥쳤어요. 서동만(전 국정원 기조실장, 2009년 작고), 오귀환(전 한겨레신문 편집국장) 김부겸(전 의원) 등이 함께 있었죠.” 81년 사법시험을 합격한 강씨는 며칠 뒤인 9월 2일 연수원에 입소했고, 연수원 월급으로 그의 사식을 댄다. 83년 가을 고인은 출소하고 두 사람은 이듬 해 4월 결혼한다. 그 즈음 김씨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언론사에 입사 면접을 본 적이 있다고 한다. “남부지원에 있으면서 시위 대학생 무죄 판결 등을 내려 법원 행정처에서 제게 난리를 치던 때였어요. 면접하던 사장이 ‘당신 전과도 문젠데, 부인까지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했대요. 그 때 이미 평범한 취업의 문은 사실상 닫힌 뒤였던 거죠.”
이듬해인 85년 고인은 서울 신촌에 서점 ‘오늘의 책’과 출판사 ‘이론과 실천’을 내고, 출판인의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책을 고르고 기획하고 꾸리는 고인의 감각은 탁월했다고 한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책 표지를 전문 디자인업체에 맡긴 최초의 한국 출판인으로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인쇄나 표지 코팅이 못 마땅하다며 초판 전량을 폐기한 예도 있었다. 후배 출판인인 박성식(도서출판 다빈치 사장)씨는 “86년에 낸 교수대로부터의 편지도 그런 예였어요. 다들 멀쩡하다고 하는 데도 당신이 마음에 안 든다고 다시 찍게 했죠. 그 표지는 지금 서점에 갖다 놔도 미학적으로 처지지 않을 겁니다..” 체코 공산당원인 한 언론인이 게슈타포에게 고문당하면서 처형되기 직전까지 담배 종이 등에 기록한 일기와 편지를 묶은 그 책은 당초 한 출판사에서 ‘후환’이 두려워 미적대던 걸 고인이 직접 번역해 낸 거였다.
고인의 출판 이력에서 가장 도드라진 사건은 87년 칼 마르크스의 자본 출판일 것이다. 그 계기나 동기 역시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이미 오래 전부터 영어판으로 읽으며 필사본까지 만들어 보던 고전 중의 고전을 명색이 출판인이 된 뒤에도 권력이 두려워 내지 못한다는 게 견디기 힘들었을 거라는 게, 지인들의 짐작이다. “운동권 CA(제헌의회)그룹 멤버들이 마르크스 레닌 원전들을 번역해서 지하출판물로 내곤 하던 때였어요. 태경이가 그 멤버들에게 전격적으로 제안을 한 거죠. 정식으로 독일어 판을 번역 출판하자고요.” 번역 원고를 고인은 친구인 동아대 강신준 교수에 건네 감수를 부탁했다. 그렇게 출간된 자본 1권은 한국 출판을 옥죄던 거대한 금기 하나를 허무는 상징이자 실질적인 무기였다. 그 일로 고인은 다시 수배되지만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나 형을 살지는 않는다. 서울대 김수행 교수의 자본(비봉출판사) 1권이 출간된 것은 89년 3월이었다.
하지만 출판사 이론과 실천의 살림은 그 즈음서부터 표나게 기울기 시작한다. 유통 마진을 둘러싼 마찰, 판매량을 둘러싼 오해 등으로 고인과 대형 서점, 대학가 서점 등과의 갈등이 악화해 출판사 살림에 치명적인 영향이 미친 것도 그 무렵인데, 당시 서울의 서점들에는 한동안 ‘우리는 이론과실천사 책은 판매하지 않습니다’라는 안내문구가 나붙기도 했다. 인문사회과학 출판 경기도 퇴조기로 접어들었다.
고인의 탐미 취향이 더 과격하게, 거의 파괴적으로 표출된 것도 그 즈음서부터였듯 듯하다. 한 지인은 “움켜쥐고 있던 걸 놓아버린 사람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고 말했다. 최고를 알아보는 감각과 최고여야 직성이 풀리던 성정은 음식과 술을 좇는 데서 특히 두드러졌다. 가까이 지낸 이들 중에 그를 통해 누린 미식의 기억 한두 개쯤 없는 이들이 없을 정도였다. “어떤 음식이든 최고를 맛보려면 어디를 가야 하는지 주르르 꿰고 있었어요. 간판만 보고도 맛이 어떨지 알아내는 동물적 감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좋은 음식 좋은 술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어요. 한 끼 밥값으로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돈을 낸 적도 있어요” 그는 자신이 누리는 최고의 것들을 늘 주변 사람들과 아낌없이 또 대가 없이 나누었다. 고인은 90년대 중반 지인과 여행사를 동업한 적도 있는데, 그 컨셉트도 소수를 위한 ‘최고의 여행지, 최고의 음식’이었다고 오귀환씨는 회고했다. 강금실 씨는 “개업식 날 고인이 강남의 단골 일식집 주방장을 초빙해 푸진 대접을 했던 기억도 난다”고 말했다.
그는 요령 있는 경영인은 아니었다. 아니 경영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에겐 시장성보다는 책 자체의 가치가 우선이었고, 마진보다는 책의 완성도가 중요했다. 그리고 버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썼다. 고인은 두어 차례 부도를 냈고, 그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이들도 적지 않았다. “경제관념이 희박했어요. 상식과 달랐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평생 자기 명의로 재산이란 걸 가져본 적도 없죠. 빚내서 못 갚은 것도 많지만, 빌려주고 못 받은 건 더 많을 거예요. 아니 빌려줬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을지 몰라요.”(박성식씨) 양춘승(서울대상대 74학번)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상임이사가 들려준 일화다. “79년 10월 남민전 사건 터지기 직전이었어요. 당시 전 시위 주동하다 구속돼 28개월 살고 나와 고향(장흥)에 내려가 있었는데, 잠깐 외출했다가 집에 가는데 검은 세단이 동네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 길로 도망을 쳐 민중문화사로 전화를 했죠. 그 때 태경이가 제게 준 돈이 무려 10만원이었어요. 자취방 얻고 이불 사고 솥 사고 쌀 사고도 돈이 남았어요. 하지만 그 뒤로 단 한번도 그 이야길 먼저 꺼낸 적이 없는 친구였죠.” 강금실씨는 “순수한 사람이란 걸 의심한 적 없어요.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죠. 다만 제가 곁에 있어 문제가 더 악화한다는 생각, 함께 있으면 결코 안 풀릴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2000년 이혼한다.
겉으론 까칠하고 쥐어박듯 퉁명스럽지만 속정도 깊어, 86년 1월 후배 출판인 이상경씨가 사회과학출판사를 해보려고 찾아갔던 날 고인의 첫 마디가 ‘학교 앞에서 맥주집이나 하라’는 거였다고 한다. 따로 출판사를 하던 이씨는 훗날 ‘친구미디어’라는 이름으로 ‘이론과 실천’과 살림을 합쳤고, 이원호씨의 베스트셀러 밤의 대통령, 화성남자 금성여자등을 내기도 했다. “별난 사람이었어요.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서도 인격적인 대접을 요구하며 역정을 냈고, 혈압이 270, 280으로 치솟아 약을 줘도 거부한 채 ‘병실로 옮겨달라. 조용한 데 가면 혈압 내려간다’고 고함을 지른 적도 있어요. 정말 신기한 게 실제로 병실로 옮겼더니 혈압이 내리더군요.”(이상경씨)
고인은 3년 전 뇌경색으로 쓰러졌다가 수술 뒤 회복됐으나 올 1월 간암 판정을 받았다. 숨지기 사흘 전 병실을 찾은 강금실씨에게 고인은 “당신에게 잘못했던 거, 이 사람에게 다해줬다”고 말해 부인 김인미씨와 셋이서 웃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의 30년대 프롤레타리아 문학 작가 고바야시 다카지(小林多喜二)의 선집 완간을 유언으로 남겼다. 30년대 게잡이 어업노동자들의 실상을 고발한 게공선의 작가인 다카지의 선집은, 직원들 거의 모두가 ‘안 팔릴 책’이라며 만류했으나 고인의 고집으로 2권까지 출간됐다. 이론과실천 최금옥 영업팀장은 “한번 꽂히신 책은 누가 뭐래도 출판해야 했고, 그것도 흡족하게 잘 만들어야 만족하는 분이었어요. 유언까지 하셨으니 지켜야죠”라고 말했다.
부인 김인미씨는 고인을 “넘치게 좋은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2004년 만나 함께 산 두 사람은 10주년 되는 올 8월 지인들을 초대해 멋진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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