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경험은 쉬이 잊히지만 어떤 체험은 한 인간의 일생을 덮기도 한다. 이탈리아의 유태계 작가 프리모 레비에게 그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다. 다양한 형식으로 여러 작품을 남긴 그이지만, 등장인물의 발목을 잡는 것은 수용소에서 보낸 나날이다. 이 나날이 만든 질문 역시 어김없이 되풀이된다. ‘이것이 인간인가?’
김종철은 탈핵의 윤리와 상상력에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러 떠난 비행 편대의 조종사 클로드 이덜리 소령의 후반생을 소개한다. 이덜리는 원폭투하일부터 평생 악몽에 시달렸고, 제대 후엔 감옥에 가기 위해 강도질을 일삼았다. 10만 명의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한 양심의 가책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미국 정부와 군 동료들이 이덜리를 대하는 태도다. 너만 양심이 있느냐는 비아냥거림이 날아들고, 법에 따라 정당하게 수행한 공무이므로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다는 입장이 모범답안처럼 제시되었다. 이덜리를 정신병자로 몰아 병원에 강제로 가두기까지 했다. 미국 정부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죽은 일본 민간인들의 실상을 자국의 국민에게 알리지 않고 차단해왔던 것이다. 이덜리는 원자폭탄으로 한꺼번에 저 많은 인명을, 단지 적국의 국민이라는 이유로 살상한 짓을 애국(愛國)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것이 인간인가?’
여말선초의 혁명가 정도전도 스무 살 젊은 나이에 평생 잊지 못할 체험을 한다. 1361년 10만 명이 넘는 홍건적이 고려를 침공한 것이다. 고려의 정규군은 붉은 두건을 머리에 두른 도적 떼를 막지 못했다. 왕은 수도인 개경을 버리고 지금의 안동까지 피난을 떠났다. 도성을 차지한 도적 떼는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정도전은 똑똑히 보았다. 왕과 대신들은 홍건적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가장 먼저 달아났으며,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아파 죽은 이는 이 땅의 백성이었다. 도적 떼로부터 백성을 지키지 못하는 나라가 어찌 나라이겠는가. 쑥대밭이 된 전쟁터에서 정도전은 묻고 또 물었다. ‘이것이 인간인가?’
정혜윤의 신작 그의 슬픔과 기쁨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26명과의 대화를 모은 르포 에세이다. 나이도 성격도 살아온 환경도 제각각인 노동자들이 2009년부터 현재까지 함께 모여 해고 철회와 전원 복직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기간 동안 해고자와 그 가족 25명이 목숨을 잃었다. 정혜윤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의 이름을 소제목으로 나열하지 않고, 그들이 같이 겪은 일들을 1년 단위로 묶었다. 홀로 떨어져 외로움과 슬픔에 젖지 않도록, 책에서나마 노동자들을 엮어 어깨동무를 하도록 만든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이 아름다운 동행이 군데군데 갑자기 끊긴다. 노동자들의 이야기 속에 종횡무진 등장하던, 꼭 한 번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싶던 노동자가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드는 것이다. 시간이 멎은 듯, 침묵의 행간으로 질문이 튀어나온다.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물음은 두 가지 다른 빛깔을 띤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저따위 짓을 하느냐는 분노의 표출이 첫 번째다. 가해자들이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국가를 위해 회사를 위해 혹은 사사로운 개인의 욕심을 채우려고 피해자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분노는 폭발한다. 또 다른 빛깔은 날카롭고 뜨겁진 않으나 더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질문을 던진 이에게 끈질기게 되돌아온다. 당장 내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 썩어빠진 세상을 외면하진 않았던가. 끔찍한 불행이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일 수도 있었음을 실감하였으니, 나는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만 할까.
SNS에 올라온 갖가지 글과 사진과 동영상들은 이 물음의 변주다. 답을 찾기까지 어쩌면 평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캘리그라퍼 강병인 씨가 페이스북에 옮겨둔 문장에서 이 먼 여행에 어울리는 첫 이정표를 발견했다. 체 게바라가 어린 자녀에게 남긴 편지의 일부다.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진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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