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박(固縛)은 선박 안에 화물을 싣고 묶어서 고정시킨다는 뜻의 일본식 한자어다. 기계 선박업계의 사람들이 흔히 쓰는 이런 전문용어를 일반인들은 잘 알기 어렵다. 시대에 맞지 않거나 우리말이 아닌 전문용어는 순화와 정비의 대상이지만, 일제의 잔재는 여전히 많은 분야에서 생동한다. 우리말로 바꾸기가 쉽지 않은 용어도 많다.
그런 전문용어는 배타와 독점의 바탕이 되고 변칙과 비리의 빌미가 되어 사회의 안전과 안정, 건전한 발전을 해치는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큰 사건 사고가 났을 때 숨겨진 비밀과 부실의 민낯을 드러내주는 핵심어가 바로 전문용어다. 세월호의 경우 화물을 많이만 실어 나르면서 고박을 경시해온 관행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번에 새로 알게 된 것에 평형수(平衡水)라는 말도 있다. 배가 안전하게 항해하려면 충분한 복원력과 적당한 흘수(吃水)가 필요하다. 흘수는 배가 물에 잠긴 부분의 깊이, 수면에서 배의 맨 아래까지를 잰 수직 거리를 말한다. 다른 말로는 끽수(喫水)다. 吃과 喫은 먹다, 마시다라는 뜻이니 물을 먹는 것이 흘수이며 끽수다.
^배가 비어 있으면 흘수가 얕아지고 복원력이 부족해지므로 해수(海水) 청수(淸水)를 밸러스트 탱크에 넣어 항해가 가능하게 만든다. 그런데 세월호는 출항 전에 이 평형수를 빼내고 허용치의 4배에 이르는 화물을 실었으니 생명선과 다름없는 흘수선을 무시하고 ‘죽음의 항해’에 나선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글자와 용어를 근본부터 따지는 것은 모든 글자와 말에는 그 분야에 중요한 원칙과 원리, 지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흘수의 ‘흘(吃)’에는 먹거나 마신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라 말 더듬다, 머뭇거리다, 나아가지 아니하다, 어눌하다, 받다, 감수하다, 이런 뜻도 있다. 그러니까 흘수에는 ‘물에 잠기되 제대로 잠기지 않으면 나아가지 말라’는 뜻까지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서울 지하철역 승강장에서 ‘바닥짐’에 관한 글을 최근에 읽었다. 요약하면 이렇다. “배가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배 밑에 채워 넣은 돌이나 물건, 즉 바닥짐(ballast) 덕분이다. 우리도 바닥짐이 있어야 무너지지 않고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 아프리카인들의 삶과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평생을 바친 영국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1813~1873)이 한 말이다. 그에게는 집을 나간 방탕한 아들이 있었다. 그런 아들을 생각하며 그는 더욱 겸손해졌고 남을 배려하게 됐다. 바닥짐은 버리는 게 아니다.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던 근심거리가 내 인생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다.”
평형수와는 좀 다른 의미로 쓰였지만 바닥짐은 항해와 인생살이에 꼭 있어야 한다. 개조나 개장(改裝)으로 배의 복원력이나 트림(선박이 외부의 힘을 받아 이루는 이물과 고물의 흘수 차)이 부족할 경우 물 외에 모래 자갈 코크스 등의 고체 바닥짐을 싣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모습을 살펴보자. 한국은 최빈국에서 단기간에 세계 15위 경제대국이 됐다. 남북통일을 이루면 세계 7위의 경제대국이 된다는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이 눈부신 성장과 발전은 평형수를 마구 빼내고 바닥짐도 없이 무모하게 눈먼 항해를 해온 결과가 아닌가. 그리하여 미증유의 침몰사태에 빠진 대한민국호는 이제 인양을 하되 수리나 개조가 아니라 새로운 선박 건조라는 절체절명의 처지에 놓인 것 아닌가.
2014년 오늘은 5월 3일이지만 대한민국 사람들에게는 4월 33일이다. 4월 16일 이후 한국인들은 비탄과 분노, 무력감과 죄책감에 묶인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사고는 한국이 달라지게 작용하는 바닥짐이 될 수 있을까. 장기적으로는 그럴지 몰라도 5월이 계절의 여왕이며 가정의 달이라는 말은 우리의 결박을 더욱 굳게 하고 아픈 마음을 더욱 아리게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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