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의 죽음을 보면서 슬퍼하는 것이 오직 인간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동물보다도 인간은 타인의 죽음에 강한 슬픔을 느낀다. 그 슬픔을 표현하는 애도의 의례들은 어느 시대, 어느 부족에게도 있었다. 옆에서 죽어가는 타인을 보며 느끼는 슬픔을, 우리 자신 또한 면할 수 없는 어떤 실존적 운명을,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삶을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어차피 각자 살고 각자 죽는 것이지만, 옆에서 죽어가는 이를 보면서 우리는 그와 자신이 죽음이라는 공동의 운명을 나누어 갖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고. 각자를 갈라놓는 죽음이 역설적이게도 다른 인간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타인의 죽음에서 느끼는 슬픔이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에서 그의 신체와 영혼 속에 깃든 어떤 세계의 죽음을, 그가 살아있었다면 계속 펼쳐졌을 어떤 가능한 세계의 종결을 본다. 그렇기에 그렇게 죽어간 세계가 훌륭한 것이었을수록 거기서 느끼는 슬픔은 더욱 크고, 더는 펼쳐질 수 없게 된 ‘가능성이 큰 것’이었을수록 거기서 느끼는 슬픔과 안타까움은 더욱 크게 마련이다. 그래서 ‘호상’이라고 불리는 죽음에선 슬픔의 감정이 상대적으로 약한 반면, 어린이나 청년의 죽음은 누가 보아도 안타깝고 슬픈 것일 게다. 면할 수도 있었던 죽음은 더욱더 슬프고, 남들을 위해 자신을 버린 의로운 죽음은 더욱더 가슴 아픈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다.
세월호에서 죽거나 실종된 이들에 대한 슬픔이 어디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지대한 것은 그 수많은 이들이 채 펼쳐지지 못한 어린 학생들이어서 그런 것이고, 배의 관리나 선원이나 대책본부의 구조작업이 제대로 되었다면 면할 수 있었을 죽음이어서, 또한 적지 않은 의로운 죽음마저 있어서 그런 것일 게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에는 또 다른 슬픔의 이유가 있다. 가까이 있었기에 죽은 이와 함께 만들어온 공동의 시간이 종결된 것이 슬프고, 이후 그와 함께 만들어갈 수 있었을 공동의 시간이 더는 지속될 수 없게 된 것이 안타깝고 슬픈 것이다. 더 이상 볼 수 없고 더는 말을 나눌 수 없게 되어서 슬픈 것이다.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의 세계가 사라져버린 것이 슬픈 것이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더욱 슬프다. 역으로, 누군가 느끼는 슬픔의 강도는 그와 얼마나 가까웠는가에 대한 징표이기도 하다.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해 수많은 국민들이 느끼는 슬픔의 범위와 강도가 이토록 넓고 강한 것을 보면, 죽은 이들을 자신의 가까운 이웃이라고 느끼는 이들이, 그들과 공동의 세계에 속해 있다고 느끼는 이들이 그토록 많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는 대통령이 군주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구조 같은 어려운 작업을 지휘할 능력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기에 그에게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인간이 다른 이의 죽음에 대해 느끼는 슬픔이나, ‘한 나라’에 사는 이웃으로서 국민 모두가 느끼는 슬픔마저 없으리라고 말한다면, 그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일 게다. 그러나 조문을 하는 대통령의 얼굴에서 슬픔을 읽지 못한 게 나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옆에 있던 유족들이 그에게서 일말의 진솔한 슬픔의 감정을 읽었다면, 그가 들고 온 화환도 걷어치웠을 리 없고, 그가 위로한 할머니가 정말 유족 맞나 확인해 보진 않았을 것이다.
2주일의 숙고 끝에 신중하게 ‘사과’를 했지만, 그 사과를 유족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단지 그가 가능한 구조작업마저 불가능하게 저지하던 무능한 정부조직의 책임자여서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을 참기 힘든 참사의 현장을 직접 방문하면서도, 안타까운 죽음이 산처럼 쌓인 곳에 조문을 가면서도,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느끼는 슬픔의 한 조각도 나누어 갖지 않은 그 닫힌 감정 앞에서 느꼈을 절망적인 서운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도자’는 그만두고라도, ‘인간’이란 말, ‘이웃’이란 말을 어찌 써야 할지 모르게 만드는 어떤 깊은 단절의 감응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 그가 우리의 대통령이라니!
이진경 서울과학기술대 기초교육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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