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4개국 순방은 워싱턴에서 ‘아시아 베팅’으로 불렸다. 긴급한 국제 현안을 뒤로 하고 다급한 문제가 없는 아시아로 간 때문이다. 유럽과 중동의 서쪽 대신 동쪽의 아시아를 방문한 탓에 ‘오바마의 동진’이란 말도 나왔다.
오바마가 7일 간의 일본 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순방을 마치고 29일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이제 남은 것은 아시아 베팅에 대한 평가. 전체적으론 아시아 재균형(중심)정책에 대한 아시아국가들의 의구심을 일정 불식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가 주종이다. 오바마가 행동으로 아시아에서 우크라이나와 같은 사태가 전개되지 않을 것이란 신호를 보냈다는 것이다. 주간지 뉴요커는 아시아에 중시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로 아시아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강화시켰다고 평가했다. 오바마는 아시아 재균형 정책 가운데 군사ㆍ외교 등 안보에서 큰 선물도 챙겼다. 그러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일본의 비협조로 진전을 보지 못해 경제는 빈손이었다.
브라운 형제 필리핀, 최대 성과
아시아 순방 최대 성과는 미국의 ‘브라운(갈색) 형제’로 불리는 필리핀에서 나왔다. 미국은 10년 기한의 방위협력확대협정(EDCA) 체결에 성공, 남중국해 주변으로 통하는 필리핀 내 육해공군 기지를 확보했다. 아시아로 군사력을 이동 배치하는 아시아 중심정책의 군사부문이 탄력을 받고, 중국을 겨냥한 역내 안보동맹도 한층 강화됐다. 벤 로즈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은 “아시아태평양에서 미국의 안보확약과 동맹관계에 중요한 진일보”라고 했다.
미국 입장에서 필리핀의 전략적 가치는 중국 부상으로 높아졌고, 필리핀도 남중국해 섬에서 중국과 영유권 갈등을 벌이면서 미군 지원이 요청됐다. 중국을 둘러싼 양측의 전략적 이해가 일치한 것이 1992년 수비크만을 떠난 미군이 돌아오게 된 결정적 이유다.
일본에는 주기만 하고 받지 못해
첫 방문지 일본에서 오바마는 아베 총리가 원하는 것을 주었으나 자신이 바란 것은 얻지 못했다. 오바마는 중국과 영유권 갈등 중인 센카쿠(중국명 댜오위다오) 제도를 미일방위조약 대상에 포함시켜 수호할 것을 공개 약속했다. 아베는 외교채널로 듣던 이 말을 오바마에게서 직접 듣는데 성공했다. 일본으로선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센카쿠 문제에 대응할 명분을 얻게 됐다.
오바마가 원한 건 TPP 최대 난제인 일본에게서 농산품 관세 인하의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베는 정권의 명운이 달린 이 사안에 선뜻 양보하지 않았다. 톰 빌색 미 농무장관은 일본을 빼고 TPP 협상을 마무리 짓는 방안을 발표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사실 미국 주도로 중국을 배제하고 진행되는 TPP는 아시아 재균형 정책의 한 축(경제)으로 불린다. 그런 점에서 미 언론은 TPP 협상 진전의 실패를 정책적 좌절로 평가했다.
한국에는 과거사 선물
오바마는 북한의 4차 핵실험 징후가 포착된 상황에서 한국 방문을 강행, 북한 도발에 대한 미국의 강경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미국이 동맹국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주저하지 않고 군사력을 사용할 것이라며 대한 방위공약도 확인했다. 외교가 우선인 오바마가 군사력 사용을 언급한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한국이 가장 고마워할 오바마의 선물은 한일 과거사 갈등에서 한국 편을 든 것이다. 그는 위안부 문제에 ‘끔찍, 지독, 충격’이란 말로 일본 책임을 거론해 한국 쪽에 힘을 실었다. 오바마는 아베와 사적 대화에서도 미국이 그간 지적해온 과거사 문제를 언급했다. 오바마의 이런 행보는 아시아중심전략에 필요한 한미일 3각 안보체제 구축에 한일 갈등해소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미 언론은 풀이했다.
중국 견제만 부각된 절반의 성공
TPP 협상 진전 실패는 이번 순방 의미를 군사적 성과에 치우치게 만들고, 중국 견제 행보를 더욱 부각시켰다. 필리핀의 미군 주둔 허용만 해도 해병대의 호주 해군기지 주둔, 싱가포르 연안함 배치에 이어 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모양새가 됐다. 순방 직전 미국의 아시아정책에서 군사와 외교ㆍ경제의 균형을 요구한 워싱턴의 분위기와는 다른 결과다.
오바마는 이런 부담 때문인지 29일 순방 마지막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목표는 중국에 맞서는 게 아니라 아시아의 안보를 증진시키는 것”이라며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오바마는 1966년 린든 존슨 대통령 이후 처음 방문한 말레이시아에선 동반자관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미국 보다는 중국에 좀더 가까운 말레이시아와 관계 개선을 위해 미국 외교의 고유가치인 민주화 문제를 지적하지 않은 것은 외교적 후퇴라는 평가다.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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