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23일‘ 책의 날’, 사라진 책방 골목을 찾았다. 3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여럿 있던 그 정다운 책방 골목이 이제는 없다. 하루 종일 그 골목을 다니면서 온갖 책들을 들추며 고르고 고른 몇 권을 사서 기뻐하던 추억이 나의 청춘이었다. 나는 그곳을 장사 냄새가 짙은 서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책방이란 책이 있는 방이었다. 아니 책이 사는 방이었다. 책과 만나는 방이었다. 책과 사랑하는 방이었다. 세상의 모든 책과 여행하는 곳이었다. 책방으로 들어서면서 세계 일주가 시작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정답고 아름다운 거대한 여정이자 방황이었다. 자유의 천국이자 별천지, 이상국이자 유토피아로 가는 항해였다.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 속에서 몇 시간 열심히 뒤져 마음에 드는 책 한두 권을 찾아 가슴에 안았을 때의 즐거움을 그 무엇에 비할까? 그 숭고한 쾌락의 책방들 골목이 다 사라지고 들어선 한두 개 대형 독점서점은 삭막한 책의 창고, 아니면 기껏 금전만이 오가는 슈퍼마켓 같아 싫다.
나는 선진국이라는 나라의 그 어떤 것보다도 책방이 부럽다. 지금도 골목골목마다 있는 그곳 책방들이 그립다. 백 년, 이백 년 역사의 향기와 책방마다 고유한 냄새가 그립다. 선진국만이 아니다. 인도를 비롯한 여러 소위 후진국에서도 그런 서점은 많았다. 고서를 내 집에까지 보내주는 책방이 뭄바이를 비롯해 여러 도시에 있다. 심지어 우리의 읍 정도 마을에도 평생을 그곳에서 살았다는 백발노인의 유서 깊은 책방이 있다. 달라이라마의 깊은 산악 마을 다람살라에도 있다. 리스본의 책방 레르 데바가르를 찾은 뒤로 나는 그 이름의 뜻인 슬로우 리딩을 내 슬로우 라이프의 기본으로 삼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책방이 없다. 남의 나라에 가야만 있다. 석조의 고색창연한 역이나 성, 교회나 극장, 심지어 오페라하우스나 은행을 책방으로 바꾼 곳도 미술관으로 바꾼 곳 이상으로 흥미롭다. 책과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나 여행을 떠나는 새로운 지성의 역이자 성, 성스러운 무대로 변모한 것이다. 몇 층 높이의 천장까지 서가로 꽉 채워진 책방이나 도서관은 숭고한 공간이다. 그것도 숲 속의 자연광 책방, 책 숲 속에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와 함께라면 더 무엇을 바랄까! 특히 헌책방으로 마을을 일으키는 것이 부럽다. 웨일즈의 헤이 온 와이나 벨기에 레듀처럼 없어질 마을이 헌책방 마을로 재생하는 것이 너무 부럽다. 이제 그곳들은 전 세계 애서가들의 순례지 내지 참배지가 되었다. 그곳을 찾아다니며 왜 우리에게는 그런 마을들이 있을 수 없을까, 어떻게 하면 그런 마을들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러나 내가 사는 마을길이 이 세상 어떤 순례로나 올레길보다 아름답다고 자부하면서도 책방 마을을 만들 자신은 없다. 그 어떤 풍경보다도 우리의 자연을 사랑하지만 책방 마을만은 안 된다. 마을 도서관을 만들려고 해도 어떤 행정 지원도, 마을의 관심도 없다. 이러고서 무슨 마을이니, 공동체니 하는 것일까? 함께 읽을 책 한 권이 없는 곳이 어떻게 인간의 공동체일 수 있을까?
내년에 인천이 세계 책의 도시로 선정돼 큰 행사를 한다지만 그곳은 전 세계 애서가들의 순례지나 참배지는커녕 책과 철저히 무관한 도시다. 인천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전역에서 책을 읽지 않는다. 이렇게도 책을 읽지 않는 나라가 또 있을까? 적어도 OECD니 하는 소위 선진국에서 우리의 독서 열은 가장 낮다. 도서관도 빈약하고 책방도 거의 없다. 대학도서관을 비롯하여 도서관에는 수험 준비뿐이고 독서란 없다. 수험서나 배우들 책 따위 싸구려 베스트셀러만이 판치는 슈퍼마켓 서점뿐이다. 거리나 공원, 공공교통에서도 책 읽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사실 우리 역사에는 책방이 없었다. 독서의 나라라는 말은 빛 좋은 개살구였다. 심지어 조선 시대에는 책방이 금지되었다. 그런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그러고서 책의 나라니 해서는 안 된다. 책방을 다시 열고 책을 읽자. 그것만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다.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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