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이 주일의 小史]
제135회 -4월 다섯째 주
“홍길이 형, 어디가 정상이야?”
하산하던 엄홍길은 뒤처져 오르던 그녀에게 손을 들어 정상을 가리킨 후 휴대하던 무전기를 건넸다. 새까만 얼굴로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웃는 그녀의 치아가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999년 4월 29일 오후 2시, 엄홍길대장과 시차를 두고 안나푸르나에 올랐던 지현옥은 이 대화를 마지막으로 다시는 산에 오르지 못했다. 한국 여성산악계의 선구자이자 대들보로, 20여 년을 외로움과 싸워가며 산에 올랐던 그녀는 이날‘풍요의 여신’이라 불리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다시는 깨지 않을 깊은 꿈에 빠진 것이다. 40세, 불혹의 나이였다.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지현옥은 청주 서원대 미술교육학과에 입학하며 운명처럼 산에 빠져들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던 시기, 인생의 모든 우선 순위는 산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어려운 형편에도 꾸준히 등반 실력을 갖춰가던 그는 88년,‘맥킨리 한국여성등반대’에 합류해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해발 6,194m의 북미 최고봉 맥킨리에 오름으로써 세계산악인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후 히말라야와 고산지대를 향한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89년 네팔의 안나푸르나(8,092m)와 90년 칸젠중카(8,588m)에 도전했으며 91년에는 중국 쿤룬산맥의 무즈타그아타(7,546m)를 국내 최초로 등정했다. 그리고 93년, 마침내 희말라야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올라 감격의 태극기를 꽂았다.‘한국여성 에베레스트원정대’등반대장을 맡아 5월 10일 10시 45분 최오순, 김순주 2명의 대원과 함께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 정상에 우뚝 선 것이다. 한국산악사에 길이 남을 쾌거였다.
99년 봄, 가깝게 지내던 엄홍길이 그에게 안나푸르나 도전을 권해왔다. 높이는 낮지만 예측불허의 기상과 난코스로 인해 8,000m 이상 히말라야 14좌 중 가장 험난한 곳이 바로 안나푸르나였다.
운명의 4월 29일 새벽, 지현옥은 엄홍길대장과 베이스3를 나서 정상공격에 돌입했다. 하지만 피곤한 발걸음은 조금씩 뒤처졌고 엄 대장은 앞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12시 30분, 한발 앞서 정상에 오른 엄홍길은 다섯 번 도전 끝에 맞이한 정상정복의 감격을 눈물을 쏟아낸 후 하산을 서둘렀다. 고산지대의 어둠은 쉽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원정대의 감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후 2시, 뒤늦게 정상에 오른 지현옥이 무전기로 등정 소식을 알린 후 연락이 두절된 것이다. 밤을 새우며 기도했지만, 그는 캠프3로 돌아오지 못했다. 셰르파 까미 도루지와 로프를 묶고 비탈진 설사면을 하산하는 모습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두 사람은 영원히 자취를 감췄다.
2011년, 한국산악계는 박영석마저 안나푸르나로 떠나보냈고 여성산악계는 지현옥에 이어 고미영이 2009년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8,126m)에 잠든 후, 중년의 오은선이 14좌를 완등하며 계보를 잇고 있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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