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중앙하이츠빌라의 머리가 하얗게 센 경비 아저씨는 / 저녁이면 강아지와 함께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 / 세상엔 이렇게 겸손한 분도 있다”(‘절’ 전문)
시인 이시영(65)의 열세 번째 시집 호야네 말(창비 발행)에 발문을 쓴 문학평론가 오철수는 꽉 막힌 도로 위의 택시 안에서 기사에게 ‘절’을 읊어줬더니 단 몇 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공감했다고 한다. 그는 공감의 근원이 “‘짧은 서정시’라 불리는 이시영 시인의 독특한 시 형식에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일상적인 언어와 일상적인 언어의 직물 그리고 풍성한 여백이야말로 시인과 독자를 단단히 잇는 동아줄인 것이다.
시집엔 더 짧은 시도 있다. “이 아침에도 다람쥐들은 재빨리 능선을 넘고 있겠구나”라는 한 줄짜리 시 ‘첫눈’이다. ‘가을꽃’은 단 두 줄이다. “장마가 씻어내린 보도블록 사이로 노란 꽃이 피었다 /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모른다고 하였다”
이처럼 시인은 실체를 표면 뒤에 숨기는 일 없이 풍경이나 심상을 장식 없이 드러낸다. 간결하고 맑고 또렷한 시적 정취는 ‘써던크로스역에서 기차를 타고’처럼 한 쪽을 가득 채우고도 넘치는 긴 산문시에서도 변함 없다. 짧은 서정시와 산문시, 책의 한 대목이나 신문 기사를 옮겨 적거나 재구성한 인용시 등을 오가는 그의 시 세계는 2년 전 낸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와 일맥상통한다. 시인이 가슴 속에 간직해두고 있던 아늑한 추억의 풍경과 박완서, 이문구, 민병산, 박정만, 박목월 등 동료 문인에 대한 애정을 눌러 담은 시도 적지 않다.
전작 시집을 채웠던 인용시의 비중이 대폭 줄었지만 참여시인의 면모는 변함 없다. ‘‘나라’ 없는 나라’에선 “국경도 없고 경계도 없고 그리하여 군대나 경찰은 더욱 없는” 나라를 꿈꾸고, ‘겨울 아침’에선 남대문 버스 정류장에서 가로수에 기대어 떨고 있는 노숙자에게 따뜻한 천 원짜리 한 장을 쥐여주는 ‘안 보이는 손 하나’를 본다. “이제 방파제를 넘어 사납게 울부짖는 강정바다는 더 이상 어제의 그 바다가 아닙니다”(‘구럼비의 바다’)라며 해군기지 건설로 제주의 삶이 부서지는 현실을 한탄한다.
‘첫눈’ ‘겨울밤’ ‘대설주의보’ ‘눈 속에서’ 등 한기가 엄습하는 제목이 끌어안은 시어들은 그러나 포근하고 따뜻하다. 눈 속의 어린 풀은 동승처럼 머리가 새파랗고, 가난한 사람들이 머리에 가득 쌓인 눈발을 털며 오르는 지하철 2호선은 ‘더운 발자국들’로 붐빈다. 겨울 같은 현실을 견뎌낼 수 있는 건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든 ‘결빙(結氷)’의 시절 / 그러나 호수도 한때는 뜨거웠으리!”(‘십이월’ 전문)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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