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신문과 TV 앞에서 5분을 버티기 힘듭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하늘을 보지만 어쩔 수 없이 또 리모컨을 듭니다. 화면에서 희생자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 앉습니다. 차라리 차가운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는 어린 학생들이 어딘가 볕 좋고 향기로운 곳으로 사라지는 환영을 봅니다.
주검으로 돌아온 아이들의 온몸이 타박상이라고 합니다. 주먹을 꽉 쥔 손가락은 거의 다 골절을 입었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절박하고, 얼마나 슬프고,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요…
오늘도 팽목항에 한 아이가 말 없이 들어옵니다. ‘165㎝, 아디다스 긴바지, 회색 긴팔 셔츠…’ 이름 대신 인양번호만 있습니다. 신원확인소에 들어서는 실종자 가족들, 시신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과 아직 내 아이는 살아있기를 바라는 간절함 사이에서 한없이 흔들립니다. ‘내 아이가 아니구나…’ 돌아서는 옆에서 다른 엄마가 무너져 내립니다. 끝없이 무너집니다. 열흘이 넘도록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아들을 기다리다 못해 부모가 자식의 인상착의를 빼곡히 적어 접은 종이를 경찰에게 건넵니다. 그리고 “꼭 좀 찾아달라”고 애원합니다. 배가 침몰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엄마 안녕, 사랑해’ ‘엄마, 말 못할까 봐 미리 보내 놓는다. 사랑해’ 그런 문자를 보낸 아이들입니다. 구명조끼 끈으로 서로의 몸을 묶고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한 그런 우리 아이들입니다. 부둣가 아스팔트 위에서는 중학생 밖에 안된 소녀가 조그만 몸을 옹크린 채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안산올림픽 기념관에 마련된 임시 합동분향소에서 충혈된 눈의 시민이 꾸짖습니다. “잘 다녀오겠다고 하고 갔으면 이제 다녀왔습니다 하고 돌아와야지, 녀석들아…” 누나는 “네 몫까지 효도할게, 네가 있어 행복했다”며 동생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합니다. 그 옆에는 비뚤비뚤한 글씨로 ‘과제, 꼭 돌아오기, 죽지 않기’라고 쓴 쪽지가 걸려 있습니다. 단원고 교실에는 국화 한 송이가 주인 잃은 책상을 지킵니다. 사랑하는 자식과 동생과 조카와 연인의 귀환을 기도하는 수많은 소리 없는 절규 앞에 그저 고개만 떨굴 뿐입니다.
4년 전 대지진이 휩쓴 카리브해의 아이티에 갔었습니다. 1,000만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에서 30만명이 넘게 숨졌습니다. 수도 포르토프랭스는 잿더미가 됐습니다. 무너진 도시는 마치 영화의 세트장처럼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더 믿을 수 없었던 건 길거리에 버려진 주검들이었습니다. 적게는 5, 6구에서 많게는 수십구의 시신이 길거리 여기저기에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 탐욕스런 선박회사, 재난당국의 믿기지 않는, 믿고 싶지 않은 행태를 보면서 아이티의 죽음이 떠올랐습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700달러에 불과한 아이티 말입니다. 속절없이 우리 곁을 떠난 아이들, 하지만 죽음까지 그렇게 놔둘 수는 없습니다. 끝까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아 부모와 친구와 동생의 따뜻한 배웅의 손길을 받고 하늘나라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유가족께 용서를 구합니다. 이런 거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는 저 자신도 황망할 따름입니다.
오래 전 학교 교과서에서 배웠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구절이 생각납니다. “공동묘지를 지날 때, 거기서 문득 ‘여기 열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가 누워 있다’는 묘비를 읽을 때… 정원 한쪽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햇빛이 떨어질 때… 가을날 비가 처량하게 내리고, 그리운 이의 인적이 끊길 때…” 하지만 팽목항 앞에서 안톤 슈낙의 슬픔은 사치스럽게 느껴집니다.
애써 위안을 찾습니다. 전국을 하얗게 밝히는 촛불기도회에서, 유족들이 모인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빨래 세탁해 드립니다’는 포스터를 들고 있는 중년 남자에게서, 전복죽을 휘젓는 여인과 화장실 청소라도 하겠다며 달려온 대학생에게서… 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눈물 나도록 처절한 4월의 푸르름을…
/황유석 논설위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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